제4화
- 한은하의 흐릿한 시야가 서서히 초점을 되찾자, 가장 먼저 깊은 이목구비와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를 지닌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아까 프라이빗 클럽에서 자신을 그 끔찍한 상황 속에서 구해 준 바로 그 남자였다.
- 지금 그는 몸을 살짝 숙인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한 손은 그녀의 미간 위에 머물러 있었고, 손끝은 금방이라도 닿을 듯 가까웠다.
- 길게 뻗은 손가락과 선명한 손마디에서는 묘한 안정감과 힘이 느껴졌다.
- 늘 다른 여자들 몸을 더듬고 다니던 오민준의 손과는 완전히 달랐다.
- 두 사람의 시선이 뜻밖에 허공에서 마주쳤다.
- 순간 한은하의 심장이 이유도 없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 성재석 역시 그녀가 갑자기 눈을 뜰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허공에 멈춰 있던 손을 재빨리 거둬들였다.
- 한은하가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 갑자기 아랫배 깊숙한 곳에서 익숙한 통증이 밀려왔다.
-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녀는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려 했다.
- “움직이지 마요.”
-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 동시에 따뜻한 손바닥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움직임을 막았다.
- “의사가 유산 조짐이 있다고 했어요. 며칠 동안은 반드시 침대에 누워 안정을 취해야 해요.”
- ‘아이가... 아직 있었구나.’
- 안도와 함께 밀려온 아찔한 두려움에 한은하의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 눈물은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내렸다.
- “감사해요...”
- 목이 메어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 “절 구해 주셔서... 그리고 제 아이까지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 성재석은 티슈 한 장을 뽑아 그녀에게 건넸다.
- 그리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 “우리, 어디선가 만난 적 없습니까?”
- 짧은 질문 하나에 한은하의 숨이 턱 막혔다.
- 그녀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병실의 밝은 조명 아래 성재석을 자세히 바라봤다.
- 깊게 패인 이목구비.
- 선명한 턱선.
- 지나치게 잘생겨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마저 풍기고 있었다.
- 설명하기 힘든 익숙함이 느껴졌다.
- 특히 그에게서 풍기는 차갑고 깨끗한 향은 오래전 기억 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와 관련된 장면은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 한은하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 “아마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아요. 저는 분명 처음 뵙는 분이에요.”
- 성재석의 눈빛에 아주 잠깐 실망이 스쳐 지나갔다.
- 하지만 그것도 순식간이었다.
- 금세 평소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 지잉—
- 침대 옆 휴대폰이 갑자기 거세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 밝아진 화면 위로 떠오른 이름은 오민준.
- 그 세 글자가 한은하의 가슴을 서늘하게 후벼 팠다.
-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입을 열 기회조차 없었다.
- “한은하! 지금 어디야? 당장 돌아와!”
- 오민준의 고함이 수화기 너머에서 터져 나왔다.
- 한은하는 지친 듯 눈을 감았다.
- 이제는 그와 언쟁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 “경고하는데 당장 와! 수아 손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도 병원에 얼굴도 안 비쳐? 당장 와서 사과해!”
- 분노와 짜증이 뒤섞인 목소리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 “죽은 척하지 말고 대답해! 들리냐고!”
- 아마 자신이 클럽을 나온 뒤의 상황은 오민준 친구들을 통해 이미 모두 전해 들었을 것이다.
- 그런데도 그는 걱정 한마디 하지 않았다.
- 아이가 괜찮은지 묻지도 않았다.
- 돌아온 것은 추궁과 모욕뿐이었다.
- 그 지독한 냉담함은 한은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미련마저 완전히 꺼뜨려 버렸다.
- “나 병원이야.”
- 한은하는 힘겹게 몸을 추스르며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 “병원?”
- 오민준의 목소리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 “또 아이 핑계 대면서 쇼하는 거야?”
- 그는 비웃듯 말을 이었다.
- “수아 손이 유리 조각에 베였어. 의사가 흉터가 남을 수도 있다잖아. 내가 어떻게 너 같은 악독한 여자랑 결혼했는지 모르겠다. 진짜 사람 체면 다 구겼어!”
- 악독한 여자?
- 한은하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 남편이라는 사람은 직접 그녀를 유리 파편 위로 밀쳐 넘어뜨렸다.
- 그 때문에 뱃속 아이를 잃을 뻔했다.
- 그런데 지금 그는 다른 여자 곁을 지키며 오히려 그녀를 악독하다고 비난하고 있었다.
- 그 모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혔다.
- 옆에 있던 성재석은 통화 내용을 모두 듣고 있었다.
- 그의 미간이 천천히 좁혀졌다.
- 핏기 하나 없는 한은하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 “내가 해결해 줄까요?”
- 한은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과 분노를 가까스로 눌러 삼킨 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 “제 남편이에요. 제가 직접 처리할게요.”
- “남편...?”
- 성재석이 그 두 글자를 낮게 되뇌었다.
- 순간 그의 눈빛이 한층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 “그렇다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 그는 잠시 한은하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
- “편히 쉬어요.”
-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 성재석은 그대로 몸을 돌려 병실 문 쪽으로 향했고, 나가면서 조용히 문을 닫아 주었다.
- 한은하는 닫힌 문을 한동안 바라봤다.
- 그러자 마음 한구석에 설명하기 힘든 허전함이 잔잔하게 번져 갔다.
- 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사 한 명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 “한은하 씨, 깨어나셨네요. 지금은 좀 어떠세요?”
- 간호사는 수액 상태를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 “어젯밤 병원에 오셨을 때 정말 위험했어요. 유산 조짐도 있었고요. 조금만 더 늦었어도 아이를 지키기 어려웠을 거예요.”
- 한은하는 조심스럽게 배 위에 손을 올렸다.
-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 “참, 성 회장님이 입원비도 전부 선납하셨어요.”
- 간호사는 새 수액을 연결하며 미소 지었다.
- “병원에도 특별히 부탁하셔서 최상층 VIP 1인실로 옮겨 드렸고요. 저희더러 각별히 신경 써 달라고까지 하셨어요.”
- 성 회장님... 성 씨였구나.
- 한은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지옥 같은 프라이빗 클럽 룸에 있었는데, 지금은 최고급 병실에 누워 있었다.
- 마치 긴 악몽을 지나온 기분이었다.
- 오민준에게서는 더 이상 전화가 오지 않았다. 아마 모든 잘못이 자신의 탓이라고 확신한 채 이수아 곁에서 비위를 맞추고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 지금 한은하의 머릿속에는 오민준과 이혼해 이 숨 막히는 결혼을 끝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 한은하는 휴대폰을 집어 들어 연락처를 열었다.
- 손끝이 익숙한 이름들을 천천히 지나갔다.
- 그러다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번호 하나에서 멈췄다.
-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신호음은 단 한 번만 울렸다.
- 곧바로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오빠...”
- 한은하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허약함이 묻어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한 결심이 담겨 있었다.
- “와줄 수 있어? 오빠의 사랑하는 여동생, 집에 좀 데리러 와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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