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그가 그녀에게서 본 것
- 졸업 프로젝트 주제와 지도교수 명단이 단체 채팅방에 올라왔다.
- 학생들은 일제히 휴대폰을 꺼내 들었고, 손가락이 바쁘게 화면을 오갔다. 교실 안은 웅성거림과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 한서윤 역시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목록을 빠르게 훑어내렸다.
- 주변 소음은 이미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 ‘제발, 어디 있지.’
- 한서윤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한 줄씩 확인해 내려갔다.
- 그러다 마침내 눈길을 붙잡는 문장을 발견했다.
- 여름 내내 머릿속으로 구상해 온 컬렉션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주제였다.
- 마치 누군가 자신의 생각을 들여다본 뒤 그대로 옮겨 적어 놓은 것처럼 놀라울 만큼 정확했다.
- 한서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입가로 번지려는 미소를 겨우 눌러 참으며 곧바로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 기쁨과 설렘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 지도교수 명단이 떠오르자 한서윤은 재빨리 다른 목록으로 시선을 옮겼다.
- 아까보다 훨씬 천천히 목록을 내려가던 한서윤은 이상하게 심장이 불안하게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다.
- 그리고 목록 끝에 다다른 순간, 유독 눈에 들어오는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 한지원.
- 한서윤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의 열기가 순식간에 식어 버렸다.
- 한지원은 차가운 시선과 엄격한 규율로 유명했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 제발 한지원만은 아니길 바랐지만 현실은 달랐다.
- 다른 교수들은 이미 정원이 모두 찬 상태였고, 남아 있는 사람은 한 부총장뿐이었다.
- 한서윤은 깊은 한숨을 내쉰 뒤 결국 체념한 채 앞으로 1년 동안 함께하게 될 지도교수 이름 아래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 어쩔 수 없었다.
- 한서윤은 가슴속으로 무거운 돌덩이가 가라앉는 기분을 느끼며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설령 한 부총장과 1년을 함께해야 한다고 해도 말이다.
- 그때 강민우가 옆에서 입을 열었다.
- “안됐다.”
- 조용했지만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 “원하면 나랑 바꿀래? 네가 졸업 컬렉션 얼마나 오래 준비했는지 내가 다 알잖아.”
- 강민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 “한 부총장이면 분명 계속 간섭할 텐데.”
- 한서윤은 강민우를 바라보며 웃었다.
- 강민우의 다정함은 늘 따뜻했다.
- “고마워. 진심이야.”
- 한서윤이 부드럽게 말했다.
- “근데 괜찮아. 나 잘할 수 있어.”
- 그러고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 “넌 이미 충분히 많이 도와주고 있잖아. 나 진짜 너 같은 친구 있다는 거 자랑스럽다?”
- 강민우는 작게 숨을 삼켰다.
- 한서윤의 입에서 나온 ‘친구’라는 말에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 결국 자신은 그녀에게 친구일 뿐이었다.
- 언젠가 한서윤이 자신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봐 줄 날이 올까.
- 믿음직한 친구가 아니라 한 남자로.
- 강민우는 그런 생각을 애써 밀어내고 이내 평소처럼 웃으며 말했다.
- “그럼 밥 먹으러 갈까? 개강 첫날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 사실 한서윤은 혼자 있고 싶었다.
- 복잡하게 뒤엉킨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고,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도 필요했다.
- 하지만 강민우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 그는 누구보다 소중한 친구였고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 의미가 강민우가 바라는 것과는 다를지라도.
- “좋아.”
- 한서윤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었다.
- “가자.”
-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강의실을 나섰다.
- 웃음소리는 복도를 가득 채운 학생들의 목소리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갔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들을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 유수진만은 예외였다.
- 유수진은 벽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
- 시간표가 띄워진 태블릿을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 입술을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다물고 있었다.
- 고개는 숙이고 있었지만 시선만큼은 두 사람을 향해 있었다.
- 그 안에는 분노와 질투가 뒤섞여 있었다.
- 오늘 아침 유수진은 거울 앞에서 두 시간을 보냈다.
- 가볍지만 세련된 원피스를 고르고, 자연스럽게 웨이브를 넣은 머리를 정성껏 손질했으며, 메이크업 역시 작은 부분 하나까지 신경 썼다.
- 모든 건 강민우 때문이었다.
- 그런데 강민우는 오늘 단 한 번도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다.
- 자신이 거기에 없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심히 지나쳤다.
- 반면 한서윤을 바라볼 때만큼은 달랐다.
- 세상 모든 시선이 한 사람에게만 향하는 것 같았고, 한서윤만이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 유수진은 자신도 모르게 태블릿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 도대체 한서윤의 뭐가 그렇게 좋은 걸까.
- 가슴속에서 감정이 끓어올랐다.
- ‘한서윤은 너를 좋아하지도 않잖아. 네 관심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다른 사람만 보고 있는데. 왜 그걸 모르는 거야.’
- 유수진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 눈가가 뜨거워졌다.
-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아 냈다.
- 복도 한가운데서 울고 싶지는 않았다.
- 매년 그랬다.
- 가을이 올 때마다 같은 희망을 품었다.
- 혹시 이번 여름이 지나면 강민우의 마음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 혹시 이제는 곁에 있는 사람을 바라봐 주지 않을까.
- 하지만 이번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 유수진의 마음속에는 외로움만 남았고, 그 씁쓸한 감정이 조용히 메아리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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