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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멋진 남자

  • “너 꼭 유령이라도 본 사람 같다.”
  • 강민우는 창백해진 한서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 한서윤은 아주 미세하게 움찔했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 심장은 여전히 지나치게 크게 뛰고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난 건 차분한 표정뿐이었다.
  • 말하면 안 된다. 절대 들켜선 안 된다.
  • 강민우는 몰라야 했다.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됐다.
  • 새 총장이 크루즈 여행에서 만났던 바로 그 남자라는 사실을, 그리고 매일 밤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사람이라는 걸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 새벽이 밝아 와도 잊히지 않던 얼굴.
  • 그의 슬픔이 어떤 행복보다 아름답게 느껴졌다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 안 된다. 이건 그녀만의 비밀로 남아야 했다.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사라져 버릴 환상 같은 꿈으로.
  • 한서윤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너무 자연스러운 미소여서 순간 자신조차 속아 넘어갈 뻔했다.
  • “그냥... 윤 총장님께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생각하고 있었어.”
  • 한서윤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저 총장이 바뀐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마음속에서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감춘 채.
  • 강민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 ‘여자들이란.’
  • 강민우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 ‘정말 궁금한 것도 많고, 도무지 예측이 안 돼.’
  • 그는 다시 무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총장은 여전히 연설을 이어 가고 있었다.
  • 한서윤 역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 파도 소리가 들리던 저녁 바다.
  • 붉게 물든 노을빛 아래.
  • 처음으로 그를 발견했던 순간.
  • 그리고 어쩌면 그곳에서 그녀는 평온함까지 잃어버렸는지도 몰랐다.
  • 환영 인사와 격려의 말이 모두 끝나자 강당은 금세 사람들의 발소리와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 학생들은 각자의 강의실로 흩어지며 새로 바뀐 것들에 대해 떠들어 댔다.
  • 특히 새로운 총장 이야기는 어디서든 빠지지 않았다.
  • 하지만 한서윤은 일부러 사람들 사이에 조용히 섞여 들었다.
  • 마치 군중 속에 녹아들어 스스로를 지워 버리려는 사람처럼.
  • 무대에서, 그리고 그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 감히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지만 온몸의 감각은 팽팽하게 긴장한 채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 마치 누군가가 수많은 얼굴 사이에서 끈질기게 자신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 ‘그냥 긴장해서 그런 거야. 우연일 뿐이잖아.’
  • 그런데도 설마 다시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 그렇게 갑작스럽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리고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 강의실 앞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누군가 가볍게 그녀의 팔꿈치를 건드렸다.
  • 강민우였다.
  • “수업 끝나고 레스토랑 갈래?”
  • 강민우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 “오늘은 내가 살게.”
  • 한서윤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리고 천천히 미소 지었다.
  • “좋아. 기꺼이.”
  • 한서윤은 가방 끈을 조금 더 세게 움켜쥐며 대답했다.
  • 사실 지금 그녀는 어디든 가고 싶었다. 그저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 오늘따라 예술대학교의 벽은 지나치게 좁고 답답하게 느껴졌고 기억과 의문,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불안한 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 그녀에게는 공간이 필요했다. 조용한 시간도. 그리고 깨달을 시간도.
  •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과거였던 일이 이제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 강의실 안은 공책 넘기는 소리와 낮은 속삭임, 의자가 끌리는 소리로 금세 가득 찼다.
  • 학생들은 익숙한 자리에 앉아 교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 그런데 문 앞에 나타난 사람은 교수 대신 최지은이었다.
  • 세련된 팬츠 수트를 입은 최지은은 옅은 미소를 띤 채 손을 들어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 “다들 저 보고 싶었죠?”
  • 최지은은 장난스럽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강의실을 둘러봤다.
  • 곧 여기저기서 반가운 환호가 터져 나왔다.
  • 학생들은 최지은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 최지은은 규율은 확실히 지키게 했지만 언제나 학생들 편에 서 주는 사람이었다.
  • 진심으로 도와주었고 응원해 주었으며, 가끔은 상상도 못 할 상황에서 학생들을 구해 주기도 했다.
  • “다들 새 총장님은 이미 봤겠죠?”
  • 최지은이 말을 이었다.
  • “그런데 총장님 결정으로... 오늘은 수업 안 합니다.”
  • 강의실 전체에 놀란 웅성거림이 퍼졌다.
  • 최지은은 그 반응을 즐기듯 잠시 말을 끊었고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 “오늘 여러분이 할 일은 이미 단체 채팅방에 올려 둔 시간표 확인하고, 졸업 프로젝트 주제랑 담당 교수 정하는 것뿐이에요.”
  • 최지은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덧붙였다.
  • “그거 끝나면 자유입니다. 하지만...”
  • 최지은은 또 한 번 뜸을 들였다. 이번에는 일부러 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 학생들은 숨을 죽였다.
  • “내일부터는 전원 완전무장하고 오는 거예요. 새로운 학기가 시작됐으니까요.”
  • 강의실은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 박수와 환호성, 신난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 여름은 끝났지만 올해는 시작부터 뭔가 특별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 “총장님, 잘생긴 데다 완전 멋진 사람인 것 같지 않아?”
  • 이수아가 자리에 편하게 기대앉으며 감탄했다.
  • 교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고, 여자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 그 순간 한서윤은 가슴 한가운데가 꽉 조여 드는 느낌을 받았다.
  • 뜨겁고 날카로운 감정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 질투와 닮은 감정이었다.
  • 이수아는 화려하고 자신감 넘치며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내는 여자였다.
  • 저런 사람은 어디서든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그리고 늘 사랑받는다.
  • 한서윤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 마치 머릿속 혼란까지 털어내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 하지만 이미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불안이 조용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 심장은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민혁의 이름이 들릴 때마다 반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