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사랑에 빠지다
Yanika Lero
Last update: 1970-01-01
제1화 사랑받는다는 건 참 좋은 일이야
- “서윤아!”
- 기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아침의 소란을 뚫고 울려 퍼졌다.
- 한서윤은 예술대학교 정문 계단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 스테인드글라스와 금빛 장식으로 꾸며진 웅장한 건물 앞. 한 남자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달려오고 있었다.
- 강민우였다.
- 한서윤에게 강민우는 단순한 친구가 아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친구의 얼굴이었고, 오랜 시간 곁을 지켜 온 소중한 사람이었다.
- 강민우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여름 내내 보고 싶었던 친구가 드디어 눈앞에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 개강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많은 밤을 뒤척였던가. 가슴이 저릴 만큼 그리웠고, 문득문득 한서윤 생각이 날 때마다 시간이 유난히 더디게 흘러갔다.
- 그렇게 기다리던 끝에 마침내 한서윤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 밝은 색 원피스를 입은 채 바람을 맞고 서 있는 모습도, 환하게 번지는 미소도 기억 속 그대로였다.
- “민우야!”
- 한서윤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오랜 시간 쌓아 온 우정이 그 웃음 속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다.
- 두 사람은 계단 한가운데에서 서로를 힘껏 끌어안았다.
- 몇 달 동안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들 만큼 자연스러운 포옹이었다.
-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 예술대학교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유명했다.
- 연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가까웠다. 때로는 연인보다 더 깊고 단단해 보일 정도였다.
- 그들의 인연은 입학시험이 치러지던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 긴장과 혼란으로 가득했던 첫날.
- 당시 한서윤은 겁에 질려 있었다.
- 눈에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물이 맺혀 있었고, 로비 한가운데 선 채 가방 끈만 꼭 움켜쥐고 있었다.
- “잊어버렸어... 전부 두고 왔어...”
- 작게 떨리는 목소리에는 절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 집에 작품들을 놓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였다.
- 그때 한 소년이 다가왔다.
-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고, 묘하게 사람을 안심시키는 분위기가 있었다.
- “안녕. 무슨 일 있어?”
- 부드러운 목소리에 한서윤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울먹였다.
- “나... 집에 작품들을 다 두고 왔어. 스케치도 전부... 제출할 게 아무것도 없어.”
- 소년은 말없이 한서윤을 바라봤다.
- 당황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 오히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차분했다.
- “고작 그거야?”
- 입학 기회를 날릴 위기에 처한 사람을 앞에 두고도 놀라울 만큼 태연한 반응이었다.
- “나 스케치 엄청 많아. 의상 디자인도 다양하고 스타일도 다 달라. 마음에 드는 거 골라 써. 어떻게 쓰든 상관없어. 중요한 건 시험을 보는 거잖아.”
- 한서윤은 놀란 눈으로 소년을 바라봤다.
- 경계심도 조금 있었지만, 소년은 그런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 그는 곧바로 두툼한 파일철을 내밀었다.
- 겉표지는 여기저기 닳아 있었지만 안에 담긴 그림들은 달랐다.
- 한 장 한 장이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했다.
- 파일을 펼친 순간 한서윤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 눈앞에 펼쳐진 스케치마다 재능이 넘쳐흘렀다.
- 한서윤은 떨리는 손으로 몇 장을 골라 들었고, 정신없이 감사 인사를 건넨 뒤 시험장으로 뛰어갔다.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합격 통보를 받았다.
- “한서윤 양. 예술대학교 합격을 축하합니다.”
-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의 힘이 빠질 뻔했다.
- 가슴 깊은 곳에서 안도감이 밀려왔고, 손끝은 여전히 떨렸다.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뛰고 있었다.
- 꿈에 그리던 예술대학교에 합격했다. 하지만 벅찬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 시험장으로 뛰어들어가느라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그 소년의 이름.
- 자신이 무너질 뻔한 순간 손을 내밀어 준 사람.
- 괜찮다며 등을 떠밀어 준 사람.
- 정작 그 사람의 이름조차 묻지 못했다.
- 한서윤은 곧장 복도로 뛰어나갔다. 혹시라도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 하지만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 긴 복도 위로 햇빛만 길게 드리워져 있었고, 멀리서 희미한 발소리만 들려왔다.
- 소년은 이미 떠난 뒤였다.
-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흔적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 그렇게 아쉬움만 남은 채 시간이 흘렀다.
- 며칠 뒤 첫 수업이 시작되던 날이었다.
- 학생들은 시간표와 강의실을 찾아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고, 한서윤 역시 사람들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 그러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순간, 한서윤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 소년은 창가에 기대 노트를 넘기고 있었다.
- 시험 날 들고 있던 것과 똑같은 노트였다. 입가에 걸린 옅은 미소도 여전했다.
- “너...”
- 한서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소년은 고개를 들더니 이내 환하게 웃었다.
- “우리 또 만났네.”
- 너무도 당연하다는 말투였다.
- 그제야 한서윤은 알게 되었다. 그 역시 같은 과정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늘 함께였다. 수업도 함께 들었고, 과제도 함께했다.
- 힘든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서로를 찾았고, 기쁜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함께 웃었다.
- “여름은 어떻게 보냈어? 어디 있었던 거야?”
- 강민우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 “계속 연락했는데 한 번도 안 받더라.”
- 한서윤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 “아, 민우야. 이번 여름은 진짜 다들 단체로 이상해진 줄 알았다니까.”
- 피식 웃은 한서윤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 “처음엔 부모님이 가족여행 가자고 하셨고, 그다음엔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날 데려가셨어. 마지막엔 외할머니가 장기 크루즈 여행까지 계획하셨다니까. 여름 내내 해외만 돌아다녔어. 나라가 계속 바뀌고 시차도 바뀌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니까.”
- “전혀. 진짜 며칠만이라도 혼자 있고 싶었어.”
- 입술을 삐죽 내민 한서윤의 모습에 강민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 “갑자기 왜 다들 그랬대?”
- “나도 몰라. 근데 어느 날 외할머니랑 갑판에 앉아서 석양을 보고 있는데 그러시더라.”
- 한서윤은 잠시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렸다. 마치 여름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했다.
- “넌 이제 대학교도 졸업하면 곧 일을 하게 될 테고, 프로젝트도 맡게 되겠지. 진짜 어른의 삶을 살게 될 거야. 그러면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네 곁에 있을 기회도 다시는 없을 거란다.”
- 그 말을 떠올린 한서윤은 씁쓸하게 웃었다.
- 강민우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 “근데 말이야, 서윤아. 그거 진짜 좋은 거야.”
- 그리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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