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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나를 가져봐, 한가네 사람아

  • 몇 잔째였지?
  • 두 잔? 아니, 세 잔?
  • 강서희의 정신은 이미 몽롱했다.
  • 서브우퍼의 진동이 바닥을 타고 울렸다.
  • VIP존은 조명은 호박빛 조명으로 은은하게 물들어 있었고, 넓은 공간에는 그녀와 한태언, 단둘뿐이었다. 음악은 생각을 흐리게 만들 만큼 컸지만, 서로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대화할 수 있을 정도였다.
  • 처음에는 한태언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 재킷은 벌써 한쪽에 벗어 두었고,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 셔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고, 잔을 들어 올릴 때마다 피부 밑으로 푸른 혈관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 강서희의 시선은 자꾸만 그의 손으로 향했다.
  • 나중에는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 정말 잘생겼네.
  • 그 생각이 나른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 둘은 내내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 정확히 말하면 강서희가 대부분 떠들었고, 결국 또 한진우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 끊어내지 못하는 오래된 버릇처럼.
  • 강서희는 손짓까지 섞어 가며 말을 콸콸 쏟아냈다.
  • "저 대충 왜 그가 바람을 피웠는지 알 것 같아요."
  •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 "내가 몸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그거 하나만 원했던 거예요."
  • 웃음이 어색하게 입가에서 끊겼다.
  • "날 원하는 사람도 없고, 나를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어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을 걸요.”
  • 한태언은 말없이 잔을 내려놓았다.
  • "간호사잖아요."
  • 몽롱하던 정신에 금이 갔다.
  • 강서희는 순간 얼어붙었다.
  • "뭐라고요?"
  • "간호사. 매달 보육원에 가서 봉사하고, 음식도 정말 잘하고. 그리고 지금은 병원을 그만두고 대학에서 간호학과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죠, 병원 일에 지쳐서요."
  •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반쯤 돌아왔다.
  • 강서희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 "그걸 어떻게 알아요?"
  • 한태언은 어깨를 으쓱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 "가족 모임 때 직접 말했잖아요. 집안 음식도 자주 했고요, 아무도 얘길 안 했을 뿐이지."
  • 강서희는 어렴풋이 떠올렸다.
  • 음식 나오기를 기다리던 잠깐의 시간에 흘리듯 말했었다.
  • 그때 한진우는 맞은편에서 누군가에게 아부하느라 바빴고, 아무도 듣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 "그런데… 그걸 아직도 기억해요?"
  • 한태언의 시선을 한 번도 거두지 않았다.
  • "기억력이 좋아서요."
  •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은 단 하나였다.
  • 한진우는 단 한 번도 이런 걸 기억한 적이 없다.
  • 한태언이 몸을 아주 살짝 앞으로 기울이고, 목소리를 더 낮췄다.
  • "아까 했던 이야기부터 이어서 해볼까요."
  •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 "무슨 이야기요?"
  • "당신과 한진우, 아직… 잠자리는 하지 않았다고."
  • 목덜미부터 달아오른 열기가 볼까지 번졌다.
  • "우린…"
  • 강서희는 말을 멈추더니, 자조 섞인 숨을 내뱉었다.
  • "키스만 했어요. 너무 빨리 결혼했고, 아직 결혼한지 1년도 안 됐으니까."
  • 한태언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 다 아는 사람처럼.
  • "그럼 이해되네요."
  • 그 말에는 다른 의미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 어느새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져 있었다.
  • 누가 먼저 다가간 것도 아니었다.
  • 그녀는 그의 체온을 느꼈다.
  • 깨끗한 애프터셰이브 향 사이로 술 냄새가 은은하게 섞여 있었다.
  • 그의 무릎이 스치듯 그녀의 다리에 닿았다.
  • 하지만 누구도 물러나지 않았다.
  • 젠장… 미치도록 섹시하네.
  • 한태언이 낮게 웃었다.
  • "고마워요."
  • 강서희는 잠시 멈칫하고 나서야 그가 무엇에 반응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 그리고는 기세 없이 변명했다.
  • "나 아무 말도 안 했어요."
  • "마음이 먼저 말해줬잖아요."
  • 그는 가볍게 받아쳤다.
  • 눈동자가 빛났다.
  • "망했네…”
  • 그녀가 중얼거렸다.
  • 강서희는 잔을 다시 한 모금 머금었다.
  • 이번에는 움직임이 훨씬 느렸다.
  • 머리는 어지럽고, 심장 뛰는 소리가 음악보다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 한태언이 고개를 돌렸다.
  • 그 순간, 두 사람의 거리는 이제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
  • 그의 눈 안쪽의 옅은 회색빛까지 보일 만큼.
  • 그는 입꼬리를 올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 "내 동생, 좀 더 열받게 안 해볼래요?"
  • ***
  • 강서희는 어떻게 자리에서 일어났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 분명 조금 전까지는 VIP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한태언이 그녀의 팔꿈치를 가볍게 받친 채 함께 걷고 있었다.
  • 아파트 엘리베이터 문이 미끄러지듯 열렸다.
  •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고 문이 닫히는 순간.
  • 팽팽하게 버티고 있던 마지막 이성이 툭 하고 끊어졌다.
  • 한태언이 몸을 돌렸다.
  • 그녀가 정신 차리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 키스는 급했고 거칠었다.
  • 마치 밤새 참아온 걸 더는 억누르지 않는 사람처럼.
  • 그녀가 숨을 삼켰고, 손끝은 어느새 그의 셔츠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 그의 두 손이 허리를 감싸며 그녀를 천천히 끌어당겼다.
  • 틈 하나 남기지 않을 만큼 가까이.
  • 감각이 미쳤다.
  • 한진우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 무언가를 갈구하는 기색이 없었다.
  • 한태언의 키스는 마치 귀를 기울이듯, 그녀가 내는 작은 소리 하나하나까지 조심스레 살피고 있었다.
  • 처음엔 천천히 굴리다 점점 깊어졌다.
  • 혀끝이 그녀의 혀를 스치자, 전기가 가슴을 타고 꼬리뼈까지 번졌다.
  •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 내가 어떻게 이런 걸 허락한 거지?
  • 엘리베이터가 낮게 진동하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 하지만 그녀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 그의 손바닥이 등을 따라 천천히 올라왔고, 엄지가 목덜미를 스치는 순간 몸이 가볍게 떨렸다.
  • 강서희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숨을 흘렸다.
  • 한태언이 멈췄다.
  • 이마를 가볍게 맞댄 채 흐트러진 숨을 골랐다.
  • 잠시 엘리베이터 안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와 케이블이 살짝 스치는 소리만 조용히 맴돌았다.
  • “그만."
  • 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 "여기까지만 하죠."
  • 안개 속에 찬물이 다시 한번 끼얹어졌다.
  • 그녀도 알고 있었다.
  •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걸.
  • 그는 곧 전남편이 될 남자의 친형이었다.
  • 술을 마셨고, 최소한 정신은 또렷하지 않다.
  • 이건 충동이고, 혼란이고, 용서 못 할 일이다.
  • 남아 있던 이성이 뒤늦게 밀려왔지만, 피부 아래에서 들끓는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 "당신 취했어요."
  • 그가 조용히 덧붙였다.
  • 강서희는 고개를 저으며 고집스럽게 턱을 올렸다.
  • "안 취했어요."
  • 그는 한참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 이게 충동인지, 진심인지 가늠하듯.
  • "그럼 내 이름을 불러요. 난 당신 남편이 아니니까."
  • "알아요."
  •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 딩— 하고 엘리베이터가 도착을 알렸다.
  • 문이 열리자 놀랄 만큼 큰 방이 펼쳐졌다.
  • 은은한 조명이 넓은 거실과 통유리를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 강서희의 놀란 숨을 삼켰다.
  • 그녀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 "엄청 넓네…"
  • 한태언이 뒤따라 들어와 조용히 문을 닫았다.
  • 그녀가 완전히 몸을 돌리기도 전에, 그가 다시 입을 맞춰왔다.
  • 이번에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 입맞춤은 더 깊고 더 느렸다.
  • 천천히, 오래 음미하듯.
  • 그의 혀끝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따라 그리듯 훑었다.
  • 달래듯, 유혹하듯.
  •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마치 그 허락만을 밤새 기다린 사람처럼 키스가 확 깊어졌다.
  • 무릎이 풀릴 듯했다.
  • 강서희는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고, 손끝에 단단한 근육의 감촉이 전해졌다.
  • 몸이 머리보다 먼저 반응했다.
  • 방이 부드럽게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 그녀는 또 신음을 흘렸다.
  • 부드럽고, 가리지도 않은 소리.
  • 이번엔 목 깊은 데서 올라오는 소리였다.
  • 한태언은 곧바로 한 걸음 물러섰다.
  • 짙어진 눈빛과 굳게 다문 턱에서 애써 절제하는 기색이 읽혔다.
  • "서희 씨."
  • 그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하지만 그 한마디만으로는 부족했다.
  • 강서희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 손은 여전히 그에게 얹혀 있었다.
  • 심장은 북을 두드리듯 쿵쾅거렸다.
  • 망설임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목소리가 그것을 덮어버렸다.
  • "난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그리고 내가 뭘 원하는지도."
  • 한태언의 숨이 잠시 멎었다.
  • "그러니 나를 가져요, 한태언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