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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보다 네 형이 더 잘해

너보다 네 형이 더 잘해

Sand Kastle

Last update: 1970-01-01

제1화 비밀결혼한 아내

  • 남들이 듣기엔 “아내가 가장 바닥일 때도 남편이 모든 걸 무릅쓰고 결혼했다”는 얘기는 그럴듯한 미담이었다.
  • 사람들은 한진우가 착해서 강서희를 진흙탕에서 끌어내 줬다고 말했다.
  • 그녀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시절, 그녀를 사랑했기에 내린 선택이었다고.
  • 그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 그때 강서희는 가진 돈도 없었고, 한진우와 견줄 만한 집안도 없었다.
  • 가족 모임에서 소개할 친척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 깨끗한 신원과 단정한 미소를 가진 고아.
  • 그게 전부였다.
  •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 애초에 한진우는 그녀를 세상에 드러낼 생각이 없었거든.
  • 그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그의 가족과 가장 가까운 몇몇 측근뿐이었다.
  • 강서희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적어도 예전에는 그랬다.
  • 하지만 최근 들어 그녀가 믿어 왔던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 친아버지가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 정확히 말하면, 그녀를 자신의 딸로 인정했다.
  • 최도현.
  • 개인 병실에서 아버지가 처음 그 이름을 조용히 말했을 때, 강서희는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 비극을 조금이라도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어른들이 또 하나의 거짓말을 꾸며내는구나, 그 정도로만 넘겼다.
  • 하지만 곧 변호사들이 찾아왔고, 그녀의 결혼보다도 훨씬 오래된 가문과 친자 관계를 입증하는 서류를 내밀었다.
  • 그 순간부터 그녀는 더 이상 ‘한진우의 아내’ 강서희만이 아니었다.
  • 그녀는 최도현의 유일한 상속인, 세간의 주목을 피한 채 묵묵히 거대한 기업을 일군 남자의 외동딸이었다. 하지만 이 재회는 너무 늦게 찾아왔다.
  • 최도현은 그녀를 찾았을 때 이미 병을 앓고 있었고, 온화한 미소 뒤에 자신의 병세를 숨기고 있었다.
  • 강서희는 어렵게 되찾은 가족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곧장 다시 잃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 최도현은 어느 화요일, 세상을 떠났다.
  • 강서희는 그 사실을 곧바로 한진우에게 말하지 않았다.
  •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 평범한 아내들처럼 남편 곁에 앉아 그의 품에 안긴 채, 마음껏 무너져 보고 싶었다.
  • 아버지를 찾았다고.
  • 그 아버지가 이 나라를 대표하는 대기업의 총수였다고.
  • 그리고 지금은 홀로 그의 장례를 치르고 있다고...
  • 그 모든 것을 남편에게 말하고 싶었다.
  • 하지만 한진우는 바빴다.
  • 늘 그랬다.
  • 그날 아침도 서희는 평소처럼 직접 도시락을 싸주었다.
  • 비록 한진우는 그런 정성을 거의 알아주지 않았지만.
  • 그녀는 거울 앞에 평소보다 오래 서서 치맛자락의 주름을 몇번이고 고르며, 울지 않고 말을 꺼낼 방법을 연습했다.
  • ‘아버지를 찾았어. 그런데 돌아가셨어. 지금… 당신이 필요해.’
  • 하지만 끝내 기회는 오지 않았다.
  • 그리고 지금.
  • 위시 그룹 빌딩은 오늘도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 강서희는 도시락 가방을 든 채 조심스레 회전문을 지나 로비로 들어섰다.
  • 안내 데스크 직원이 그녀를 한 번 힐끗 바라보더니 다시 시선을 내렸다.
  • “… 강서희 씨?”
  • 평소에도 그녀를 달가워하지 않던 직원이었다.
  • “제 남편이 한진우인데요. 저…”
  • 목이 메어 잠시 말을 멈췄다가 헛기침을 했다
  • “도시락을 전해주러 왔어요.”
  • 직원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였다.
  • “지금 바쁘십니다.”
  • “아, 이사회 중이죠. 맞나요?”
  • 서희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 직원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되물었다.
  • “이사회요?”
  • 그 짧은 되물음에 강서희의 속이 철렁 내려앉았다.
  • 그녀는 도시락 손잡이를 꽉 움켜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 “방해 안 할게요. 이것만 놔두고 갈 거예요.”
  • 직원이 모니터를 한 번 보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그리고 엘리베이터 출입 게이트를 열어 주며 말했다.
  • “그래요, 올라가 보시죠, 강서희 씨.”
  • 뒤에서 엘리베이터 도착을 알리는 맑은 소리가 울렸다.
  •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 직원은 달콤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 “올라가 보세요. 기분이 좀 나아질지도 모르잖아요”
  • 강서희는 올라가는 내내 스스로를 다독였다.
  • 침착하자.
  • 이사회 회의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새어 나온 불빛이 조용한 복도를 비추고 있었다.
  • 그녀는 밖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 하지만 어느새 그녀의 발은 저절로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 회의실 안에는 수많은 주주들이 없었고,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 서희의 시선은 먼저 한진우에게 꽂혔다. 그는 문을 등진 채 테이블 가장자리에 바짝 기대 서 있었고,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있었다.
  • 그리고 그 앞에는 한 여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 여자의 머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 한 손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얹혀 있었다.
  • 그 순간 모든 진실이 둔기에 얻어맞은 것처럼 그녀를 강타했다.
  • 강서희는 숨을 들이켰다.
  • 손에서 도시락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고, 도시락통은 산산조각이 났다.
  • 국물이 카펫 위로 번져 나갔다.
  • 두 사람 모두 그대로 얼어붙었다.
  • 여자가 먼저 고개를 번쩍 들었다.
  • 눈이 둥그래졌고, 입술은 퉁퉁 부어 있었으며 마스카라가 조금 번져 있었다.
  • 한진우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돌렸다.
  • 순간 당황한 기색이 스쳤고, 그는 허둥지둥 바지를 추슬렀다.
  • 하지만 이미 늦었다. 더럽고 부정할 수 없는 모든 디테일이 강서희의 뇌리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 “아.”
  • 한진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 “왔네.”
  • 서희는 그 자리에 굳은 채,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 아무것도 없던 시절부터 사랑했던 남자.
  •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서도 늘 그의 편을 들어 주었고, 밤새 그를 기다렸으며, 그의 성을 따르면서 자신의 이름마저 지워 버렸던 사람.
  • 오늘은 그들의 결혼기념일이었다.
  •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날이기도 했다.
  • 이토록 잔인할 만큼 절묘한 타이밍이라니.
  •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 한진우에게도 힘든 시절이 있었다.
  • 아버지는 회사를 장남에게 물려주었고, 그는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와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모두가 자신을 외면한다고 분노하곤 했다.
  • 그는 차남이었다.
  • 늘 밀려나고, 언제나 대안으로만 남는 사람이었다.
  • 두 사람은 같은 공허함을 안고 서로를 이해했고, 함께 정상에 오르자고 약속했다.
  • 지금의 한진우는 최고운영책임자(COO)가 되었지만, 여전히 CEO는 형이었다.
  • 그리고 지금, 그녀 앞에서, 한진우는 한 점의 부끄럼도 없이 그녀를 배신하고 있었다.
  • “미안.”
  • 서희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웃었다.
  • “미안… 이라고?”
  • 한진우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 마치 문제가 그녀에게 있다는 듯.
  •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 이 정도 위치에 오면 이런 일은 흔해.”
  • 서희는 그의 옆 여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 여자는 이미 일어나 치마를 정리하고 있었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미세한 우월감을 감추지 못했다.
  • 그 얼굴을 알아본 순간, 강서희는 뺨을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 김세린.
  • 한진우의 비즈니스 파트너 중 한 명.
  • 늦은 밤마다 걸려 오던 전화와 주말 회의에서도 수도 없이 들었던 이름.
  • 회사 연회에서 직접 악수를 나눴던 여자.
  • 서희는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 한진우는 막지 않았다.
  • 그녀는 있는 힘껏 그를 밀쳤다.
  • 한진우는 비틀거리며 김세린 쪽으로 밀려났다.
  • “우리 끝이야. 이혼 서류 보낼게.”
  • 한진우는 얼굴 하나 찌푸리지도 않았다.
  • 오히려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
  • “진심이야?”
  •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하던 그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 “서희야,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나 없으면 넌 아무것도 아니잖아.”
  • 강서희는 등을 돌렸다.
  • 그제야 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 억눌렀던 감정이 뒤늦게 밀려왔다.
  • 세 걸음쯤 걸었을 때, 그의 목소리가 다시 뒤쫓아왔다.
  • “갈 데도 없으면서.”
  • 강서희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 순간 돌아서서 자신의 얼글을 보여 주고 싶었다.
  •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보게 하고 싶었다.
  • 하지만 그럴 가치조차 없었다.
  • 강서희는 아무 말 없이 등을 곧게 편 채,
  • 끝내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