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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 간호사는 말을 마치고 살금살금 병실을 나갔다.
  • 방 안은 고요해지고 오직 기기에서 삑-삑-거리는 규칙적인 소리만 남았다.
  • 강지연이 시선을 돌리자, 벽에 걸린 TV가 어제 연예 뉴스를 반복 재생하고 있었다.
  • 화면 속 결혼식 장면이 유난히 성대했다.
  • 꽃이 바닥을 덮고, 최고급 차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 하도진은 올블랙 맞춤 수트를 입고 서 있었다. 자세는 꼿꼿했고, 눈썹과 눈매는 섬세하고 날카로웠다.
  • 그는 품 안의 정지혜를 조심스레 감싸 안고 있었다. 세상 하나뿐인 보물을 다루듯, 표정이 아주 살뜰했다.
  • 뉴스 제목이 선명하게 흘러나왔다: “하가 상속자 하도진, 오랜 지병 앓던 첫사랑과의 아름다운 결혼식!”
  • 언론은 두사람의 사랑을 과도하게 미화했다.
  • 모두가 하도진의 깊고 한결같은 사랑에 감탄했고, 정지혜가 그런 편애를 받는 걸 부러워했다.
  •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그의 법적 아내가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채 병상에 누워 있다는 걸.
  • 강지연은 조용히 화면을 바라봤다. 마음은 털끝만큼도 흔들리지 않았다.
  • 지난 3년 동안, 그녀는 하도진이 후계자 자리를 굳히고 강서구의 지하 세력을 다지도록 돕기 위해, 최고의 영예나 다름없는 흰 가운을 포기했다.
  • 그의 입맛은 물론 사소한 습관까지 전부 외웠고, 생활 전반을 도맡아 챙겼다.
  • 그게 사랑인 줄 알았다.
  • 그리고 어젯밤이 되어서야 완전히 깼다.
  • 하도진에게 그녀란, 그가 길러놓은 온순한 경비견일 뿐이었다.
  • 정지혜가 기침 한 번만 해도, 그는 주저 없이 지연을 지옥으로 걷어찼다.
  • 강지연은 속으로 싸늘하게 웃었다.
  • 그가 그토록 “후회 없는 사랑” 놀이를 하고 싶다면.
  • 그래, 실컷 해 보라고.
  • 그녀는 침대 머리맡의 병실 전화를 집어 들고, 3년째 묵혀둔 번호를 눌렀다.
  • “선생님, 저 강지연이에요.”
  • 몇 초간 정적. 이내 환호에 가까운 고함이 터졌다.
  • “지연아? 정말 너냐? 네가 의학계 떠난 뒤로는 영영 연락 안 올 줄 알았는데!”
  • 강지연은 창밖을 올려다보며, 또박또박 낮게 선언했다.
  • “선생님, 저 복귀할게요.”
  • “드디어 마음을 정했어?”
  • 들뜬 기색에, 살짝 떠보는 어조가 섞였다.
  • “너를 가사도우미처럼 부려먹던 그 남자는?”
  • 그녀는 가볍게 한 마디를 흘렸다.
  • “죽었어요.”
  • 전화를 끊었다. 눈에는 온기 한 점 없었다. 남은 건 차갑고 결연한 빛뿐.
  • 그날 오후.
  • 강지연은 휘청거리는 몸을 억지로 버티며, 혼자서 퇴원 수속을 마쳤다.
  • 병원 정문 앞, 새빨간 고급 스포츠카가 이미 길가에 대기 중이었다.
  • 강지연은 문을 열고 곧장 타올랐다.
  • 운전석의 여자가 시크하게 선글라스를 벗었다.
  • 이마에 감긴 붕대를 보자마자, 그녀의 눈빛에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 “하도진 그 놈 어제 어디 있었어? 감히 너한테 이 따위로 했다고? 내가 직접 죽여버릴 거야!”
  • 강지연은 태연한 표정으로 안전벨트를 채웠다.
  • 베프 전민정의 분노한 얼굴을 바라보지도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 “그 남자, 다른 여자랑 결혼식 올리고 있었어.”
  • 전민정은 어이없어 피식 웃었다가, 엑셀을 바닥까지 밟았다.
  • 부아앙— 스포츠카가 튀듯이 치고 나갔다.
  • “강지연, 너 그 시원찮은 놈 하나 때문에 의학계에서 외과 천재라 불리던 이름 다 버리고, 양말이나 빨아주고 구두나 닦아줬다고! 너 알기나 해? 예전엔 권력자들이 너한테 수술해달라고 무릎 꿇다시피 빌었어!”
  • “알아.”
  • 강지연은 지친 몸을 의자에 기댔다.
  • 예전의 그녀는, 저승사자에게서 사람을 빼앗아 오는 ‘고스트 닥터’였다.
  • 하 씨 일가의 지하 세력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절반은 그녀의 공이었다. 벌집이 되도록 총알을 맞고 온 부하들을, 뒤에서 밤새 꿰매 살려냈으니까.
  • 그녀는 가방에서 고무줄을 꺼내, 흐트러진 긴 머리를 묶었다.
  • 화사하면서도 날카롭고 아름다운 얼굴이 온전히 드러났다.
  • 고개를 돌려 전민정을 보며, 낮고 단단하게 말했다.
  • “민정아, 모든 집안이랑 각쪽 세력한테 다 연락해. 고스트가 돌아왔다고.”
  • 전민정의 숨이 막혔다.
  •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더니, 곧장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 “좋아! 드디어 정신 차렸네!”
  • 강지연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룸미러 속 자신을 올려다봤다.
  • 그녀는 하도진에게 똑똑히 알릴 거다.
  • 강지연은 그의 아내일 뿐만 아니라, 그의 목숨을 틀어쥘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