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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 비행기가 구름 사이를 가르며 나아갔다. 나는 과거와 이어진 모든 연결을 단숨에 끊어내듯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
  • 제주도의 작은 해안 마을은 공기부터 짭조름하고 눅눅했다. 나는 마당이 딸린 작은 하얀 집 한 채를 빌렸다. 바닷가까지는 걸어서 5분 남짓, 창문만 열어도 파도 냄새가 거실까지 스며드는 집이었다.
  • 매일 이른 아침이면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썰물이 물러간 뒤 모래 위에 남겨진 조개껍데기를 살피고, 어부들이 배를 몰아 잔잔한 수평선 너머로 나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 오후에는 마당에 앉아 책을 읽었다. 예전처럼 강박적으로 비즈니스 잡지를 뒤적이는 대신 이제는 소설과 시집을 한 장씩 느릿하게 넘겼다.
  • 이웃에는 은퇴한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가끔 우리 집 문 앞에 밭에서 갓 따온 신선한 과일을 두고 가곤 했다.
  • “혼자 지내시나 봐요?”
  • 어느 날 할머니가 다정하게 물었다. 나는 그저 살며시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을 뿐, 더 이상의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 이곳의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흐른다. 구름 한 조각이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것이 보이고 밀려왔다 물러가는 파도의 숨결도 또렷하게 들려온다.
  • 나는 이곳에서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레시피를 하나하나 따라 하며 소박한 집밥을 차려냈다. 부엌에 따스한 밥 냄새와 온기가 퍼질 때면, 문득 엄마가 생전에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떠올랐다.
  • “사람은 모름지기 제 밥 가림은 스스로 할 줄 알아야 한다.”
  • 그때는 그 말이 그저 잔소리처럼 들려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이제야 그 말의 무게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 그렇게 한 달쯤 지났을 무렵의 어느 저녁이었다.
  • 나는 해변에 앉아 천천히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양이 바다를 금빛으로 일렁이게 만들었고 파도는 바위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 그때 오랫동안 잠잠하던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 “차서윤 씨, 저 황민주예요. 그 사람이... 자살을 시도했어요.”
  • 파도 소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그 말에 손가락 끝이 떨렸다. 나는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 “상태는요?”
  • “응급처치는 끝났어요. 고비는 넘겼대요.”
  • 황민주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서윤 씨 이름만 불러요.”
  • 나는 아무 대답 없이 수평선을 응시했다. 붉은 석양이 바다 위로 선혈처럼 길게 번지고 있었다.
  • “이젠 나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 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해가 바다 너머로 완전히 침잠할 때까지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자 멀리 해안가 마을에 듬성듬성 불빛이 켜지기 시작했다.
  • 집으로 돌아와 레드 와인을 한 잔 따랐다. 창밖에서는 이웃집의 TV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고, 경쾌한 광고 음악이 차가운 밤공기에 섞여 들었다. 나는 맥북을 열고 새 이력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 ‘경력 사항...’
  • 키보드 위에 놓인 손가락이 멈췄다. 잠시 후, 나는 그 단어를 지워내고 다시 적어 넣었다.
  • ‘새로운 시작을 준비 중.’
  • 저장 버튼을 누르는 순간 온몸에서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육체적인 고단함이 아니었다.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스며 나오는 형용할 수 없는 지독한 피로였다.
  • 복수는 끝났다. 재산도 손에 넣었고 갈망하던 자유도 얻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시리도록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병상에 누워 속절없이 천장만 바라보던 그날처럼, 배 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비릿한 공허함이었다.
  • 나는 거울 앞에 섰다. 눈가에는 옅은 잔주름이 자리를 잡았고 머리카락은 어느새 어깨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 지난 3년 동안, 나는 매일 다른 사람이 되어 연기하며 살아왔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가면을 벗은 원래의 내 얼굴이 어떤 표정이었는지조차 희미했다.
  • 창밖으로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천천히 채워갔다.
  • 나는 불을 끄고 어둠 속에 누워 가만히 빗소리를 들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태어나지 못한 그 아이가 만약 살아 있었다면 과연 누구를 닮았을까.
  • 다음 날 아침, 나는 마당에서 데이지에 물을 주고 있었다. 햇살은 아직 부드러웠고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 그때 골목 끝에서 택배 트럭 한 대가 멈춰 섰다. 기사가 내려 납작한 상자 하나를 내려놓고는 이내 떠났다. 잠시 후, 고요를 깨는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상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발신인란은 비어 있었고 인쇄된 내 주소만이 기계적인 글씨로 또렷하게 붙어 있었다. 나는 가위를 가져와 조심스럽게 테이프를 그어 상자를 열었다.
  • 종이 상자 안에는 제왕나비 표본 하나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나비의 날개는 정중앙이 두 동강 나 있었고, 어두운 붉은색 액체 같은 것으로 거칠게 이어 붙여져 있었다.
  • 곧이어 코끝에 이질적인 냄새가 스쳤다. 비릿한 쇳내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나비의 몸통을 살폈다. 그 작은 배 위에 삐뚤빼뚤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 ‘도승헌’
  • 순간 손끝이 덜컥 떨렸다. 가위가 손바닥에서 미끄러져 돌계단 위로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며 떨어졌다. 마침 울타리 밖을 지나던 이웃 할머니가 궁금한 듯 고개를 내밀었다.
  • “서윤 씨, 선물이라도 왔나 보네요?”
  • 나는 급히 상자를 덮으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 “아, 광고 샘플이에요. 별거 아니에요, 할머니.”
  •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멀어지자마자 나는 도망치듯 집 안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 나는 등으로 문을 짚은 채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손에서 놓친 상자가 바닥을 굴렀고 뚜껑이 열리며 망가진 나비가 마룻바닥 위로 툭 떨어졌다.
  • 나는 한동안 그 기괴한 나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바닷가 소도시, 공들여 찾아낸 나의 피난처는 이제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 나는 벌떡 일어나 차 키를 움켜쥐고 곧장 경찰서로 향했다. 당직 경찰은 내 신고를 기록하며 상자를 유심히 살폈다.
  • “발신인 정보도 없고 지문도 검출되지 않습니다. 이런 건 추적이 쉽지 않습니다. 단순 장난일 수도 있고요.”
  • “피예요. 냄새를 맡아봤어요. 이건 분명히 피라고요.”
  • 내 확신에 경찰은 잠시 멈칫하더니 장갑을 끼고 면봉을 꺼냈다. 붉은 자국을 문질러 시료를 채취한 뒤 증거 봉투에 밀봉했다.
  • “일단 감정을 보내겠습니다. 하지만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 경찰서 창밖으로는 바다가 보였다. 파도는 평소처럼 잔잔하게 밀려왔다 물러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이미 거대한 해일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경찰은 내 창백한 안색을 살피더니 나직하게 덧붙였다.
  • “당분간은 다른 곳에 머무시는 게 좋겠어요.”
  •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모든 문과 창문을 걸어 잠갔다. 커튼도 빛 한 점 새어 들지 않게 단단히 쳐 두었다.
  • 휴대폰을 탁자 위에 던져두고 소파 구석에 몸을 웅크렸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숨을 죽이자 작은 바람 소리에도 심장이 발밑으로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 그때 마당 대문에서 갑자기 끼익 하는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나는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섰다.
  • 나는 조심스럽게 커튼 틈 사이로 밖을 살폈다. 잠시 후, 길고양이 한 마리가 울타리를 훌쩍 넘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손바닥은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 완연한 어둠이 깔렸지만 불을 켤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나는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으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여권과 비상용 현금을 가방 깊숙이 눌러 담았다.
  • 그 순간, 3년 전의 기억이 섬광처럼 뇌리를 스쳤다. 도승헌이 나를 차가운 창고에 가둬 두었던 그 밤. 그때의 공포가 해일처럼 밀려와 목을 조여 왔다.
  •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아 욕실로 달려가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고개를 들자 거울 속의 내가 보였다. 초점이 흐릿한 눈은 핏발이 서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때
  • 탁자 위에 두었던 아이폰 화면이 돌연 번쩍였다. 모르는 번호로 온 문자였다.
  • [자기야, 날 보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