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 퇴원하던 날, 햇살이 눈을 찌를 듯 눈부시게 쏟아졌다.
- 빛이 번져 눈가가 얼얼했지만 눈물은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 도승헌은 직접 차를 몰고 나를 데리러 왔다. 완벽하게 재단된 맞춤 정장을 입은 그는 얼굴에 흠잡을 데 없는 다정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가 차 문을 열어주며 내 손목의 거즈를 손끝으로 가볍게 스쳤다.
- “아직 아파?”
- “아니, 안 아파. 네가 옆에 있으니까.”
- 그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손끝으로 내 턱을 들어 올리는 그의 눈빛은 아내를 걱정하는 남편의 것이 아니라, 귀한 수집품을 감상하는 수집가의 시선과 닮아 있었다.
- 저택으로 돌아온 첫날 밤, 그는 거실 소파에 깊숙이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나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턱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 “이리 와.”
- 나는 거역하지 않고 얌전히 그의 앞에 섰다. 도승헌은 손을 뻗어 내가 신은 슬리퍼를 천천히 벗겼다.
- “바닥이 차가워. 네 손으로 내 발 좀 데워줘.”
- 내 손끝이 반사적으로 움찔 떨렸다. 하지만 나는 곧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의 발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 구두 밑창에 묻어 있던 정원의 잔디 조각이 내 손바닥을 거칠게 긁어 벌겋게 자국을 남겼다.
-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그의 발을 녹였다. 이 굴욕의 시간은 언젠가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 내가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가장 확실한 기록이 될 테니까.
- “우리 서윤이, 갈수록 철드네.”
- 그는 여전히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내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말투는 건조하고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 나는 대답 대신 소매 속에 숨겨 둔 녹음기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기계의 딱딱한 감촉이, 내가 이 모든 것을 견뎌야 할 이유를 다시 상기시켰다.
- 다음 날 새벽,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도승헌의 비서가 급히 결재를 받아야 한다며 계약서 뭉치를 들고 찾아왔다.
- 나는 서류를 건네받아 서재로 향하던 중, 복도에서 발이 홱 미끄러졌다.
- 파라락.
- 서류가 바닥에 우수수 흩어졌다. 게다가 맨 위에 있던 계약서는 내가 쏟은 커피에 젖어 엉망이 되어버렸다.
- “무슨 일이야?”
- 위층에서 도승헌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얼음장처럼 싸늘한 어조였다. 내 얼굴에서 순식간에 피기가 가셨다. 허둥지둥 몸을 웅크려 서류를 줍는 순간, 날카로운 종이 모서리에 손가락이 스치며 얇게 베였다.
- “미안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눈가가 금세 뜨거워지며 눈물이 고였다. 계단을 내려온 그가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 그 시선이 등에 꽂힐 때마다 소름이 돋았지만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얼룩진 계약서를 들어 올려 그에게 내밀었다.
- “지금 바로 비서한테 연락해서 다시 준비하게 할게. 일정에 차질 없을 거야.”
- 비굴할 정도로 고개를 숙인 나의 정수리 위로, 그의 서늘한 시선이 한참 동안 머물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도승헌이 불쑥 웃더니 허리를 굽혀 나를 일으켜 세웠다.
- “됐어. 네 탓 안 해. 서윤아, 너 아직 몸도 완전히 회복 안 됐잖아.”
- 나는 눈을 내리깔아 눈 밑을 스치는 냉기를 감췄다.
- 그날 밤이었다. 그가 샤워하는 동안 휴대폰이 침대 머리맡에서 충전되고 있었다.
- 나는 스킨케어 제품을 챙기는 핑계를 대며 조용히 다가갔다. 이미 외워 둔 비밀번호로 화면 잠금을 풀었다.
- 앨범에는 수상한 것이 없었지만 곧장 열어본 은행 이체 내역은 달랐다. 나는 휴대폰으로 재빨리 사진을 찍고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았다.
- 마침 그때 욕실 문이 열렸다. 도승헌이 수건 하나만 두른 채 나왔다. 젖은 머리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그의 쇄골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 “뭐 보고 있었어?”
- 그가 다가와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 “내일 아침에 뭐 해줄까 생각하고 있었어.”
- 나는 몸을 돌려 까치발을 들고 그의 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가 만족스러운 듯 웃더니 나를 침대 가장자리에 앉혔다.
- “발이 좀 시리네. 씻겨 줘.”
- 나는 따뜻한 물을 떠 와 그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내 손끝이 그의 발목에 닿자마자, 그가 무심하게 말을 던졌다.
- “다음 주에 부모님 뵈러 가자.”
- 내 손이 아주 미세하게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숙인 채 얌전히 대답했다.
- “응, 알았어.”
- 따뜻한 물이 그의 발등을 적셨다. 그리고 분노로 몰래 움켜쥐었던 내 손가락 마디마디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 나는 물그릇에 비쳐 일그러진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입꼬리가 아주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
- 도씨 가문 저택에 가기 전날, 나는 혼자 병원을 찾았다. 몸 상태를 재검진하려는 게 아니었다. 사고 당일, 나를 처음 진료했던 이예서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 “차서윤 씨, 몸은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해요. 감정 기복도 최대한 피하시고요.”
- 이예서는 안경을 살짝 치켜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그녀 앞에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밀어 놓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선생님, 제가 그렇게 된 게... 정말 병원에 늦게 와서였나요?”
- 그녀가 잠시 동작을 멈추더니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 “솔직히 말씀드리면 도착하셨을 때 생체 징후가 많이 불안정하긴 했어요. 하지만 아기 심장 박동이 그때 아주 약하게나마 남아 있었어요. 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면 지킬 희망이 분명히 있었죠.”
- 심장 한가운데를 날카로운 갈고리로 움켜쥐는 것 같았다. 나는 손끝이 하얘질 때까지 무릎 위 주먹에 힘을 주었다.
- “하지만 그날 저에게 사망 판정을 내린 의사는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했어요.”
- “김수찬 선생을 말하는 거죠? 그분은 도 대표님 개인 주치의예요. 사고 당일 수술 스케줄도 도 대표님이 직접 전화로 잡으셨고요.”
- 진실은 얼음으로 벼린 칼날이 되어 내 심장을 거칠게 꿰뚫었다.
- 만약 그 사고가 단지 나를 시험하려는 연극이었다면 왜 아이가 아직 숨을 쉬고 있는데도 포기하게 만든 걸까.
- ‘도승헌, 너는 처음부터 이 아이가 살아남기를 바라지 않았던 거야.’
- 병원을 나오니 하늘이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듯 잔뜩 흐려 있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도승헌이었다.
- “어디야? 기사 보낼게.”
-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소름 끼칠 만큼 다정했다.
- “쇼핑몰에서 옷 좀 보고 있어. 어르신들 뵙는데 대충 입고 갈 수는 없잖아.”
- 나는 일부러 톤을 높여 가볍게 대답했다.
- “무리하지 말고 일찍 들어와.”
- 그는 짧은 당부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꺼진 화면 위로 비치는 내 서늘한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 나는 길가에 서서 끝없이 이어진 차량 행렬을 바라보다가 불쑥 웃음을 터뜨렸다. 웃다 보니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차가운 눈물방울이 손등 위로 톡톡 떨어졌다.
-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도승헌은 거실에서 통화 중이었다. 내가 들어서자 그는 손짓으로 잠시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내더니 휴대폰에 대고 낮게 읊조렸다.
- “그 돈 빨리 처리해. 흔적 남기지 말고.”
- 나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쇼핑백을 들고 다가갔다.
- “이 원피스 어때? 어머니가 좋아하실까?”
- 그는 전화를 끊고 다가와 내가 고른 원피스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 “취향 좋네. 어머니도 분명 좋아하실 거야.”
-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 “너 눈이 왜 이렇게 빨개? 너 울었어?”
- “아니, 아까 밖에서 바람이 너무 세서 눈이 좀 시렸어.”
- 나는 애써 눈가를 비비며 돌아서서 옷을 걸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따라와 뒤에서 내 허리를 단단히 감아쥐었다.
- “서윤아, 나한테 거짓말하지 마.”
- 순간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심장이 한 박자 어긋난 듯 요동쳤다. 그의 목소리는 다정한 듯했지만 그 아래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숨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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