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차서윤 씨라고 불러주세요. 도승헌 씨와의 이혼 합의서는 오늘 오전 법원에 제출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도씨 가문의 안주인이 아닌, 한 개인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장내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나는 잠시 객석을 훑으며 숨을 고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도승헌 씨는 심각한 심리적 결함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가까운 사람들을 한계까지 몰아넣고 굴복시키는 과정을 ‘충성 테스트’라 부르며 즐겼습니다.”
나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단 한마디도 그가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제가 임신 5개월 차에 아이를 잃어야 했던 그 비극적인 사고... 그것은 불운한 교통사고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설계한 가장 극단적이고 잔인한 마지막 테스트였습니다.”
그 순간 대형 화면에 마지막 결정적 증거가 떠올랐다. 도승헌이 사고 가해 운전자에게 무려 8억 원을 이체한 금융 기록이었다.
회견장은 순식간에 경악과 분노가 섞인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나는 일부러 말을 멈추고 그 소음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대중의 시선이 화면에 박힌 8억이라는 숫자에 완전히 집중된 것을 확인한 뒤, 나는 차갑게 덧붙였다.
“친자도 아닌 아이에게 그토록 집착하며 저를 압박했던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의 뒤틀린 자존심을 지탱해 줄 완벽한 인형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가문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타인의 삶뿐만 아니라 자신의 핏줄조차 기만할 수 있는 사람, 그게 바로 도승헌의 본모습입니다.”
기자회견은 이후 30분 동안 폭풍처럼 이어졌다. 나는 쏟아지는 날 선 질문 하나하나에 얼음처럼 침착하게 답했다. 마지막 질문까지 마친 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대 뒤로 돌아오자마자 휴대폰이 비명을 지르듯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지은우가 아이패드를 내밀며 나직하게 말했다.
“대한민국 모든 커뮤니티와 뉴스 채널을 완전히 점령했습니다.”
화면 상위 키워드는 온통 방금 끝난 회견의 잔상들로 가득했다.
도승헌_충성테스트
8억_살인미수
도씨그룹_퇴출운동
차서윤_이혼선언
기자회견 라이브 영상은 SNS와 커뮤니티를 타고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특히 병실에서 도승헌이 내뱉었던 “가장 위대한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말은 삽시간에 대중의 분노를 발화시켰다.
모든 비난의 화살은 이제 단 한 사람, 도승헌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신성시했던 ‘테스트’라는 단어는 순식간에 조롱 섞인 유행어가 되어 박제됐다.
누군가에게 부당한 갑질이나 도덕적 압박을 가할 때 비꼬는 최악의 표현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도씨 그룹의 공식 홈페이지는 접속 폭주로 마비되었고, 고객센터는 분노한 시민들의 항의 전화로 종일 불통 상태였다.
오후 장이 열리자마자 도씨 그룹의 주가는 수직 낙하하며 붉은 비명을 질렀다. 이사회는 긴급회의를 소집해 도승헌의 즉각적인 직무 정지를 강력히 권고하며 등을 돌렸다.
나는 아이패드 화면을 끄고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지긋지긋한 두통이 밀려왔지만 속은 오히려 시원했다. 그때 발신자 표시가 없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화면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차서윤, 너 정말... 지독하네.”
분노를 억누르느라 거칠게 떨리는 도승헌의 목소리였다. 나는 창가로 걸어가 발아래 펼쳐진 도시의 복잡한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시작일 뿐이야. 네가 나에게 준 고통을 단 한 방울도 빠짐없이 네 입에 다시 들이부어 줄 거거든.”
휴대폰 너머에서 무언가 요란하게 부서지는 굉음이 들려왔다. 쾅! 날카로운 파편 음 뒤로 그의 비릿한 웃음이 이어졌다.
“고작 이 정도로 날 끝장낼 수 있을 것 같아? 도씨 가문의 뿌리가 네 짐작보다 얼마나 깊고 거대한지 곧 깨닫게 될 거야.”
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아주 낮은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그럼 어디 끝까지 가보자고. 그 거대하다는 뿌리가 썩어 문드러지는 게 먼저일지, 아니면 내가 먼저 멈추는 게 먼저일지. 누가 먼저 무너지는지 지켜보는 것도 꽤 흥미롭겠네.”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곧바로 스트리밍 플랫폼을 켜자, 한 경제 채널에서 도씨 그룹 본사 앞 상황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었다. 화면 속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기자들이 입구를 완전히 봉쇄했고, 분노한 시민들이 든 피켓이 거대한 파도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그때 카메라는 갑자기 한곳을 향해 집요하게 줌인했다. 수많은 경호원에게 겹겹이 둘러싸인 채 도망치듯 차량에 올라타는 남자는 도승헌이었다.
화면은 그의 초라한 뒷모습을 놓치지 않고 따라붙었다. 단정했던 머리는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고 값비싼 맞춤 정장은 보기 흉하게 구겨져 있었다. 평소 도승헌이 내뿜던 그 오만한 여유는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라이브 중계 화면을 끄고 휴대폰을 가방 속으로 던져 넣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담당 변호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도씨 가문 측에서 이혼에 최종 동의했습니다. 서윤 씨가 제시한 재산 분할안도 토를 달지 않고 전격 수락했습니다.”
나는 아파트 창가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침 햇살에 젖은 한남동 거리는 폭풍이 지나간 뒤처럼 유난히 고요했다.
“세부 조항은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가문 측에서는 최대한 빨리 서명을 마치고 이 소동을 매듭짓길 원하고 있습니다.”
나는 노트북을 열어 이혼 합의서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도씨 그룹 지분 15%, 한남동과 평창동의 저택, 그리고 평생을 쓰고도 남을 거액의 신탁 자산까지... 한때는 이런 숫자들에 마음이 흔들리거나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애썼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 그것들은 그저 승리의 전리품이자 무의미한 문장에 불과했다.
“그리고...”
변호사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승헌 씨가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직접 만나고 싶어 합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노트북을 닫았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전해줄 말도, 들을 말도 남지 않았으니까요.”
사흘 뒤, 약속된 이혼 날짜가 밝았다. 나는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법무법인에 도착했다. 회의실 문을 열자 변호사가 이미 자리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가문 측 대리인이 도착할 겁니다. 도민철 씨가 직접 나올 모양입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준비된 서류 위에 ‘차서윤’ 세 글자를 정갈하게 써 내려갔다. 펜촉이 종이를 긁는 사각거림이, 지난 몇 년 동안 나를 숨 막히게 옭아맸던 족쇄가 하나씩 끊어지는 소리처럼 경쾌하게 들렸다.
그때 회의실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도민철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들어섰다. 그의 뒤에는 두 명의 변호사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있었다.
“다 끝났나?”
그는 냉랭하게 물으면서도 차마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나는 서명을 마친 서류를 조용히 밀어 그가 앉은 테이블 앞으로 보냈다.
도민철은 서류를 낚아채듯 훑어보더니 아무 말 없이 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자신의 이름을 휘갈겨 썼다.
펜을 내려놓는 소리가 탁 하고 날카롭게 울렸다.
“도씨 가문을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더군. 이제... 만족해?”
나는 내 서명이 선명하게 남은 서류를 차분히 챙겨 가방에 넣었다.
“저는 그저 빼앗겼던 제 몫을 되찾았을 뿐이에요. 그 과정에서 무엇이 부서졌든 그건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니죠.”
도민철이 벌떡 일어서자 의자가 비명을 지르듯 삐걱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그가 이가 갈리는 소리로 덧붙였다.
“승헌이, 결국 입원했다. 기자회견 직후에 정신이 완전히 무너졌어. 실어증에 공황 장애까지... 네가 바랐던 게 이런 거야?”
나는 가방 지퍼를 올리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내게 던졌던 고립과 고통에 비하면, 병실 안의 안락함은 오히려 지나치게 관대한 처분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담담하게 응시했다.
“정말 유감이네요. 도승헌이 말하던 ‘위대한 테스트’를 정작 본인은 통과하지 못한 모양이라서.”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미련 없이 회의실을 나섰다. 등 뒤에서 도민철이 거칠게 욕설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남의 일이었다.
로펌 건물 밖으로 나오자 눈부시게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길가에는 지은우의 차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그가 창문을 내리며 물었다.
“완전히 정리된 거예요?”
나는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었다. 무릎 위에 놓인 가방의 무게가 어쩐지 가볍게 느껴졌다.
“가장 빠른 시간으로 제주도행 티켓 하나 끊어줘요.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네요.”
“알겠어요.”
차가 천천히 미끄러지듯 출발했다. 창밖으로 빠르게 멀어지는 서울의 빌딩 숲 사이로, 오랜 시간 나를 짓눌러왔던 과거의 조각들도 함께 흩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