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 [예슬 시점]
- 출국 당일이 되자 마음이 적잖이 초조해졌다.
- 어제 감정적으로 굴어서 강세혁의 화를 돋우는 게 아니었다.
- 이제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지?
-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고, 속이 타들어 가는 듯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졌다.
- 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백혜주가 뒷짐을 진 채 안으로 들어왔다.
- 퉁퉁 부어오른 얼굴 위로 시퍼렇게 든 멍 자국이 퍽 우스꽝스러웠다.
- 나는 비릿하게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 "완전 피에로가 따로 없네. 기념으로 사진이라도 몇 장 찍어줄까?"
- 그녀의 눈빛이 독사처럼 음침하게 번뜩였다.
- "백예슬. 주제파악 못 하고 날뛰는 것도 여기까지야. 네가 한 짓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줄게!"
- 혜주는 등 뒤에서 실크 스카프 한 장을 쓱 빼들더니, 라이터로 지체 없이 불을 붙였다.
- "그때 그 화재 사건 기억나?"
- 그녀가 악마처럼 입꼬리를 찢어 웃었다.
- "세혁 오빠가 날 얼마나 끔찍하게 아끼는지 알지? 네가 나한테 앙심을 품고 불을 질렀다는 걸 알면, 오빠가 널 얼마나 싫어하게 될까?"
- 시뻘건 불길이 치솟자, 끔찍했던 그날의 기억 파편들이 일순간 머릿속을 덮쳐왔다.
- 소름 끼치도록 악의적인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 "사랑하는 우리 언니. 세혁 오빠가 날 얼마나 사랑하고 널 얼마나 벌레 보듯 혐오하는지, 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해줄게!"
- 호흡이 걷잡을 수 없이 가빠졌고, 나는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뒷걸음질 쳤다.
- 그녀가 미친 듯이 박장대소했다.
- "너한테도 쥐약인 게 있었네? 그때 불타면서 꽤 아팠나 봐? 혹시라도 까먹었을까 봐, 내가 친절하게 복습시켜 줄게."
- 혜주가 불붙은 스카프를 내 쪽으로 휙 내던졌다.
- "오지 마!" 나는 패닉에 빠져 침대맡으로 물러서며 베개를 집어 들어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 하지만 스카프는 침대 위로 떨어졌고, 순식간에 캐노피에 불길이 옮겨붙었다.
- 다급히 베개를 휘둘러 불을 끄려 했지만, 공포에 질린 팔은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 그날의 화마가 남긴 끔찍한 트라우마 속에서, 눈앞으로 쉴 새 없이 날아드는 불붙은 스카프들은 곪아있던 상처를 잔인하게 후벼 팠다.
-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 "그를 구한 건 나였는데… 이 사기꾼아!"
- 나는 넋이 나간 채 짓씹듯 중얼거렸다.
- "그래서 뭐 어쩌라고? 오빠는 내 말만 믿는데."
- 베개로 간신히 불길 몇 군데를 잡아냈지만, 정신은 이미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 백혜주가 또다시 불길을 머금은 스카프를 내던진 순간, 나는 옆에 있던 스툴을 움켜쥐고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 날아오던 스카프가 스툴 다리에 걸렸고, 시뻘건 화마가 내 얼굴을 향해 매섭게 혀를 날름거렸다.
- 심장이 멎어버릴 듯한 공포감이 온몸의 기력을 남김없이 앗아갔다.
- 하지만 나는 질끈 눈을 감은 채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어 그녀를 구석으로 밀어붙이고 스툴로 짓눌러버렸다.
- 찢어질 듯한 비명이 다락방의 적막을 날카롭게 갈랐다.
- 강세혁과 경호원들이 문을 박차고 들이닥쳤을 때, 나는 혜주를 벽에 옴짝달싹 못 하게 처박아 둔 상태였고, 스툴 다리에 엉킨 스카프에서는 독기 품은 불길이 미친 듯이 타오르고 있었다.
- 불길이 스툴 위로 치솟아 내 살갗을 핥아댔지만, 어떤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 나는 벼랑 끝에 몰린 야수처럼 핏발 선 눈으로 강세혁을 악착같이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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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호원들이 재빨리 달려들어 불길을 진압했다.
- 혜주의 팔은 끔찍하게 그을려 얼룩덜룩해졌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피부 위로 커다란 수포들이 흉측하게 부풀어 올랐다.
- 그녀는 너무 아파서 강세혁의 품에 안기지도 못한 채, 숨죽여 앓는 소리만 냈다.
- "예슬 언니가... 그날의 화재를 영원히 기억하게 해주겠다고…"
- 그 한마디가, 강세혁의 가장 나약한 아킬레스건을 단숨에 끊어발겼다.
- 남자의 눈빛이 순식간에 살얼음판처럼 차갑게 돌변하더니, 시퍼런 얼음칼이 되어 나를 푹푹 쑤셔댔다.
- "어디 한 번 변명해 봐. 이번엔 기회를 줄 테니까."
- 한참의 정적이 흐른 뒤에야, 산산이 조각났던 이성이 간신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 나는 극도로 지친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 "저 애가... 스스로 불을 질렀다고 하면, 넌 믿어줄래?"
- 강세혁이 당장이라도 하관을 부숴버릴 듯 무자비한 악력으로 내 턱을 콱 틀어쥐었다.
- "거짓말을 할 거면 좀 더 그럴싸하게 대가리를 굴려."
- 그의 두 눈에는 나를 찢어 죽일 듯한 분노가 소용돌이쳤다.
- "그 화재가 혜주한테 얼마나 끔찍한 트라우마인지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런 애가 널 모함하겠다고 제 몸에 불을 질렀다고?!"
-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무겁게 눈을 감았다. 어차피 믿지 않을 거라면, 더 이상의 변명은 구차할 뿐이었다.
- 이제 이 남자와 피곤한 입씨름을 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저 1초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
- 백혜주는 이번엔 정말로 심한 화상을 입었다. 과거의 그 가짜 흉터가 이제는 진짜가 되었으니, 앞으로는 굳이 아픈 척 연기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 더는 내 앞에서 얄밉게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여력도 없이, 그저 바닥에 처박혀 앓는 소리만 토해내고 있었다.
- 강세혁은 거칠게 내 턱을 놓아버리고는, 깨질세라 조심스럽게 혜주를 안아 들고 병원으로 향했다.
- 방을 나서기 직전, 그는 사형 선고 같은 한마디를 툭 던졌다.
- "백예슬 이 방에 그대로 처박아 둬. 내가 돌아오기 전까진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얼씬 못 하게 감시해."
- 그들이 우르르 계단을 내려가고 나자, 비좁은 다락방에는 또다시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 그제야 팔과 종아리의 피부가 타들어 갈 듯 욱신거린다는 걸 깨달았다. 수포가 터져 나온 진물이 핏물과 엉겨 붙어 뚝뚝 떨어졌고, 수만 개의 바늘이 생살을 파고드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몰려왔다.
- 지옥 같던 기억의 파편들이 다시금 머릿속을 헤집어 놓으며 온몸이 통제할 수 없이 파들파들 떨렸다.
- 나는 굳게 닫힌 철문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
- "누구 없어요?! 나 화상 입었어요, 제발 구급상자 좀 가져다줘요——!"
- 하지만 바깥은 숨 막히도록 고요할 뿐이었다.
- 문에 등을 기댄 채 차가운 철판에 기대어 숨을 고르며, 필사적으로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 지금 시간은 정오. 비행기 이륙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3시간뿐이었다!
- 이런 쥐구멍 같은 곳에 처박혀 끝날 순 없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여길 빠져나가야 해!
- 매서운 시선이 두꺼운 침대 시트에 가닿았다.
- 이곳은 4층 다락방. 대략적인 길이를 가늠해 보려 했지만, 벼랑 끝에 몰린 공포감 탓에 도무지 계산이 서질 않았다.
- 나는 살가죽이 벗겨지는 듯한 작열감을 억누르며, 시트를 길게 찢어 단단하게 엮어 임시 밧줄을 만들었다.
- '밧줄'을 기둥에 단단히 묶고서, 비틀거리며 창틀 위로 기어 올라갔다.
- 화상을 입은 두 손은 밧줄을 쥐는 것조차 버거웠다. 나는 두 다리로 거친 천을 꽉 조인 채 덜덜 떨며 미끄러져 내려갔다.
- 천 조각이 상처 부위를 사정없이 긁고 지나갈 때마다 생살을 칼로 저미는 듯한 통증이 척수를 타고 올랐다.
- 마침내 체력이 한계에 다다랐고, 지면을 얼마 남기지 않은 허공에서 스스로 손을 놓아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 쿵! 착지하는 찰나 발목이 기괴하게 꺾였고, 끔찍한 파열통이 불길처럼 전신으로 번져갔다.
- 흙바닥에 나뒹굴며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비명조차 새어 나가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 열린 창문 틈으로 경호원들의 잡담 소리가 섬뜩하게 흘러나왔다.
-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해. 대표님 뚜껑 제대로 열리셨는데 여기서 또 무슨 일 생기면 우리 다 모가지야."
- "그러게 말입니다. 예슬 아가씨도 참 징하게 기를 쓰시네요."
-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치며 식도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 숨죽여 타이밍을 엿보던 나는,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참고 몸을 일으켜 담장을 넘은 뒤, 절뚝이며 강세혁의 저택을 완전히 벗어났다.
- 발목은 골프공만 하게 부풀어 올랐고, 화상을 입은 살갗에선 진물과 피가 질척하게 배어 나왔다.
- 병원에 들를 시간 따윈 없었다. 한시라도 지체했다간 덜미가 잡힐 게 뻔했기에,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으로 내달렸다.
- 내 끔찍한 몰골을 본 항공사 직원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당장 병원부터 가야 한다고 만류했다.
- 하지만 나는 핏물이 고인 입술을 꽉 깨물고, 그들의 모든 도움을 처절하게 거절했다.
- 난 반드시, 무조건 이 지옥을 떠나야만 해!
- 굉음과 함께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오르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마침내, 내가 이 지옥을 벗어났다는 걸 실감했다!
-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핸드백 안에서 소름 끼치는 전화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발신자는 다름 아닌, 강세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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