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 [백예슬 시점]
- 집에 돌아오자마자 엉망이 된 원피스를 벗어 쓰레기통에 미련 없이 처박았다.
- 그러고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캐리어에 대충 짐을 꾸려 넣었다.
-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 지긋지긋한 사람들을 곧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듯했다.
- 문득 강세혁의 옷장으로 시선이 향했다.
- 저 안에 걸린 슈트부터 넥타이, 자잘한 액세서리 하나까지 전부 내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 익숙한 옷감과 서늘한 넥타이핀, 커프스버튼을 천천히 쓸어내리자 가슴 한구석에서 짙은 미련이 울컥 밀려왔다.
- 열세 살. 내가 그를 처음 만났던 나이.
- 함께했던 지난 7년 동안, 우리는 참으로 눈부시게 행복했다.
- 나는 오래전부터 내 평생의 반려자는 오직 그뿐일 거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 하지만 백혜주가 이 관계에 끼어든 순간부터 모든 것이 속절없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 그리고 지금, 나는 마침내 마음을 바꿨다.
- 달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강세혁이 돌아왔다.
- 캐리어를 구석에 밀어 넣고 드레스룸 밖으로 나서려던 찰나, 억센 힘이 내 허리를 감아채며 나를 제 품으로 확 끌어당겼다.
- 그가 나른한 숨을 내쉬며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고, 직후 가슴팍에 차가운 감촉이 떨어져 내렸다.
- 아까 레스토랑에서 집어 던졌던 그 블루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다시 내 목에 걸려 있었다.
- 하지만 그의 몸에서 훅 끼쳐오는 낯선 여자의 옅은 향수 냄새에 미간이 확 구겨졌고, 나는 신경질적으로 목걸이를 뜯어내 그의 손에 거칠게 쥐여주었다.
- "필요 없어. 네가 주고 싶은 사람한테나 줘버려."
- 그가 내게 준 첫 번째 선물이었기에 그동안 내 몸의 일부처럼 애지중지 아껴왔다.
- 하지만 지금은 그저 끔찍한 조롱거리에 불과했다.
- "아직도 화 안 풀렸어?"
- 강세혁이 나직하게 실소를 터뜨렸다.
- "너 요새 부쩍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거 알아?"
- 나는 그 역겨운 품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 "명색이 네 약혼녀인데, 네 몸에선 다른 여자 향수 냄새가 진동을 하잖아. 이거 정상이 아니라고는 생각 안 해?"
- 그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이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 "내가 혜주를 챙기는 건, 걔가 내 목숨을 구해줬기 때문이잖아."
- "2년 전 그 끔찍했던 교통사고 기억 안 나? 혜주가 그 불길 속에서 날 꺼내지 않았다면 난 진작에 죽었을 목숨이야."
- "생명의 은인한테 그 정도 마음 쓰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이야?"
- "그 화재로 혜주 몸에 남은 흉터나 트라우마를 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리는지 넌 알기나 해?"
- 순간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으며, 그날의 지옥 같았던 기억이 맹렬하게 덮쳐왔다.
- 그날, 광기에 사로잡힌 백혜주의 차가 내 차를 미친 듯이 뒤쫓아 왔고, 쇳덩이가 살벌하게 긁히는 마찰음과 함께 측면을 무자비하게 들이받았다.
- 목구멍까지 심장이 튀어나올 듯한 공포 속에서, 나는 사력을 다해 액셀을 밟고 스티어링 휠을 꺾으며 어떻게든 백혜주를 따돌리려 발버둥 쳤다.
- "쾅——!"
- 측면을 강타하는 폭발적인 충격이 전신을 휩쓸었다.
- 차체가 통제력을 잃고 허공을 나뒹굴었고, 눈앞의 세상이 기괴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 금속이 찢겨 나가는 파열음과 유리가 산산조각 나는 굉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고, 안전벨트가 흉곽을 옥죄어와 갈비뼈가 부러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간신히 차 밖으로 기어 나왔을 때, 내 시야에 들어온 건 팔짱을 낀 채 이 끔찍한 참상을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는 백혜주였다.
- 곧이어 시뻘건 불길이 치솟으며 숨 막히는 열기가 얼굴을 덮쳤고, 나는 반사적으로 조수석을 향해 몸을 던졌다.
- "강세혁, 제발 정신 좀 차려 봐!"
- 술에 취해 잠들어 있던 그는 찌그러진 좌석에 끼인 채 완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 화마가 차체를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고, 나는 혜주를 향해 절규했다.
- "빨리 와서 좀 도와줘! 세혁이가 안에 갇혔다고!"
- 백혜주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 "오, 오빠가 왜 언니 차에 타고 있어?"
- "따질 시간 없어! 당장이라도 차가 폭발할 것 같단 말이야!"
- 하지만 내 절박한 외침에 돌아온 건 요란한 엔진의 굉음뿐이었다.
- 백혜주는 나를 버려둔 채 그대로 도망쳐 버렸다.
- 짙은 공포와 절망이 나를 집어삼켰지만, 나는 피부를 태울 듯한 열기를 견디며 맨손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잠금장치를 비틀고 찌그러진 쇳덩이를 악착같이 뜯어냈다.
- "강세혁, 눈 좀 떠 봐! 제발!"
- 사력을 다해 불지옥 속에서 남자를 끌어낸 바로 그 순간, 등 뒤로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시뻘건 불기둥이 지옥의 문처럼 치솟아 올랐다.
- 병원으로 실려 온 후, 나는 찢어진 상처만 대충 지혈한 채 강세혁의 병실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 하지만 백혜주가 이미 내 자리를 꿰차고 그의 침대 곁을 지키고 있었다.
- 온몸에 과장된 붕대를 칭칭 감은 그녀는 끔찍했던 상황을 무용담처럼 지껄이며 가증스러운 눈물을 흘렸다.
- 강세혁은 그런 혜주의 손을 애틋하게 쥐며 맹목적인 감사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 모든 진실이 재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내 결백을 증명할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 이 사건은 훗날 우리의 관계를 갉아먹는 지독한 싸움의 불씨가 되었다.
- 사실 그날의 교통사고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수차례의 피부 이식과 흉터 치료를 받았음에도, 내 팔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화상의 흔적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 긴 시간 심리 치료를 받았지만 불길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고, 작은 불꽃만 보아도 숨이 막히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 귓가를 때리던 화마의 포효와 매캐한 기름 냄새가 여전히 코끝을 찌르는 듯해,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억누르며 그에게 물었다.
- "네가 기억을 잘못하고 있는 거라면 어쩔래? 널 구한 게 혜주가 아니라면?"
- 그의 미간이 험악하게 일그러졌고, 목소리엔 짜증이 가득 묻어났다.
- "혜주의 팔다리에 그 끔찍한 화상 흉터가 남아있는데, 목숨 걸고 날 살려준 애를 어떻게 그딴 식으로 매도해?"
- 나는 처절한 조소를 흘렸다.
- "그 흉터,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본 적이나 있어?"
- 그는 나를 서늘한 눈빛으로 한참을 바라보더니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 "백예슬. 네가 날 사랑하는 건 알지만, 네 감정은 선을 넘었어. 너무 집요하고 끔찍하다고."
- 남자가 다시 나를 옭아매듯 끌어안았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히고 익숙한 체취가 폐부를 채웠지만,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이 치밀어 올랐다.
- 나는 안간힘을 써서 그의 가슴을 밀쳐냈다.
- "이거 놔. 네 몸에서 나는 딴년 냄새, 진짜 역겨우니까!"
- 강세혁은 흠칫 놀라더니, 분노로 얼굴이 굳어진 채 뒤로 반 걸음 물러섰다.
- 바로 그 순간, 화장대 위에 올려둔 내 휴대폰 화면이 밝아지며 항공권 예매 확정 알림이 떠올랐다.
- 화면을 힐끗 본 그의 손이 내 휴대폰을 향해 뻗어왔다.
- "항공권? 너 어디 가려고?"
-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휴대폰을 낚아채듯 감싸 쥐었다.
- "머리 좀 식히고 오려고."
- 그의 안색이 먹구름처럼 음침하게 가라앉았다.
- "이 와중에 바람 쐴 정신이 있나 보지?"
- 그는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억누르며 선고하듯 내뱉었다.
- "너 요 며칠 정말 선 세게 넘었어. 당장 비행기표 취소해. 그리고 내일 혜주한테 가서 정식으로 사과하고 좋게 풀어. 도망친다고 해결될 문제 아니잖아."
- 곧 이 지옥을 떠날 거라 다짐했음에도, 내 심장은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 "내가 왜 사과를 해? 전부 백혜주가 꾸민 짓인데 넌 눈이 멀기라도 한 거야? 넌 평생 혜주 말만 믿고 살잖아!"
- 그의 눈동자에 노골적인 혐오와 짜증이 번뜩였다.
- "백예슬. 지금 네 상태로는 도저히 말이 안 통하겠네."
- "내가 그동안 오냐오냐 다 받아주니까 네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막 나가는 거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네 응석 따위 받아주지도 않았어. 지금 네 꼴이 얼마나 추악하고 질투에 눈이 멀었는지 네 스스로 거울이라도 좀 보라고!"
- 나는 그가 쏟아내는 그 잔인하고 폭력적인 모욕들을 무표정하게 귀에 담았다.
- 그러고는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그를 똑바로 직시하며 나직하게 내뱉었다.
- "강세혁. 너 설마 잊었어? 예전에 네 입으로 직접 말했잖아. 네가 나한테 못살게 굴면, 난 언제든 널 영원히 떠나도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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