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 [예슬 시점]
- 강세혁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실소를 흘렸다.
- "내가 너한테 못살게 군다고? 그래, 너한테 유독 엄격했던 건 인정해. 하지만 그건 나쁜 뜻이 아니라, 전부 다 네가 걱정되고 신경 쓰여서 그런 거야."
- 가슴팍에 차가운 소름이 돋았다. 레스토랑 바닥에 내팽개쳤던 그 블루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어느새 다시 내 목에 걸려 있었다.
- 그의 커다란 손이 허리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가더니, 단숨에 내 몸을 번쩍 안아 올려 제 허리에 내 다리를 감게 했다.
- 귓바퀴를 뜨겁게 핥고 지나가는 숨결과 함께, 끈적하고 다정한 입맞춤이 목선 위로 빈틈없이 쏟아져 내렸다.
- "너도 참, 쓸데없이 예민하게 구네.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
- 허벅지 안쪽에서부터 달아오른 열기가 확 번지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파드득 떨려왔다.
- "강세혁…"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온몸의 뼈마디가 녹아내린 듯 손끝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 남자는 짙은 미소를 머금은 채, 제 꼿꼿하고 단단한 열기를 내 아래에 빈틈없이 밀착시켰다.
- 억눌렀던 신음이 터져 나오려는 찰나, 그는 나를 벽으로 거칠게 밀어붙이며 입술을 집어삼켰다.
- 장장 7년. 내 몸은 이 남자가 던져주는 쾌락의 덫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 아무리 살벌하게 다퉜어도, 그는 늘 침대든, 책상이든, 소파든, 집안 곳곳으로 나를 몰아넣고 거칠게 안아 끔찍할 만큼의 쾌락을 안겨주며 그에 대한 원망을 새하얗게 지워버리곤 했다.
- "이거 놔…"
- 나는 쥐어짜듯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 하지만 가슴팍으로 파고드는 입술과 맞닿은 살갗을 타고 전해지는 델 듯한 열기에 저항은 속절없이 흩어졌다.
- "이제 그만 화 풀어, 응?"
- 눈을 감자, 경매장에서 전 재산을 털어 이 목걸이를 내 눈앞에 바치던 과거의 그가 떠올랐다.
- 그때의 강세혁은 나를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처럼 조심스럽고 애틋하게 대했었다.
- 하지만 지금 그의 눈동자에는 숨 막히는 통제욕만이 번들거리고 있을 뿐이다.
- 그 값비싼 블루 다이아몬드는 어느새 내 심장에 박힌 눈물이 되어버렸다.
- 차가운 펜던트를 매만지며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변한 건 나일까, 아니면 이 남자일까.
-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인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 "먼저 씻고 올게. 좀 이따 다시 안아줄 테니까 기다려."
- 그 가벼운 한마디가 저울 한쪽에 위태롭게 떨어진 마지막 추 같았다.
-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짓밟힌 이성이 내 머릿속을 향해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더는 이 수렁에 빠지지 마! 그가 널 다시 난도질하게 내버려 두지 말라고!
- 그럼에도 내심 기적 같은 요행을 바라며, 오늘의 강세혁은 어제와 다를지도 모른다는 멍청한 기대를 품었다.
- 반나절 전만 해도 다 잊겠다고 수백 번을 다짐했건만, 견고하게 세웠던 방어선은 그가 밀어붙일 때마다 터져 나오는 내 신음과 함께 처참하게 허물어지고 말았다.
-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강세혁의 자리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고, 나는 텅 빈 천장을 바라보며 한참이나 멍을 때렸다.
- 7년. 내 몸과 마음은 이미 그에게 완벽히 길들어, 남자는 그저 자극적인 정사 한 번이면 족했다.
- 그것만으로도 내 결심을 하찮게 헤집어 놓을 수 있었으니까. 정말이지 구역질 나게 우스운 꼴이다.
- 처절한 자조 섞인 헛웃음을 흘리는데, 때마침 이삿짐센터의 도착을 알리는 초인종 소리가 적막을 깼다.
- 찰나의 망설임이 일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문을 열어주었다.
- 작업실로 들어선 인부들은 내가 그린 유화들을 에어캡으로 겹겹이 두르고 조심스럽게 상자에 담아 포장하기 시작했다.
- 이 캔버스들은 머지않아 내가 새롭게 뿌리내릴 낯선 땅으로 보내질 것이다.
- 예술은 내 삶의 유일한 숨통이었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 내 평생의 꿈이었다.
- 하지만 백연그룹의 인간들은 나를 잘 팔릴 정략결혼용 체스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취급을 했고, 상업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미술 공부를 철저하게 짓밟았다.
-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 답답한 저택에 틀어박혀 남몰래 물감을 짜고 붓을 쥐는 것뿐이었다.
- 방구석에 비스듬히 세워진 초상화 하나가 눈에 띄었다. 캔버스 속 여자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으나, 그 눈동자에는 심해처럼 깊고 우울한 슬픔이 고여 있었다.
- 나는 작업반장을 향해 각별히 신신당부했다.
- "이 그림은 가장 튼튼한 자재로 포장해서 꼭 단독으로 박스에 넣어주세요."
- "알겠습니다."
- 인부가 싹싹하게 대답했다.
- 그건 내 자화상이었다. 강세혁과 피 터지게 싸울 때마다, 억눌린 감정을 쏟아내듯 캔버스 위에 덧칠을 올린 결과물.
- 땀을 흘리며 박스를 나르는 인부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가라앉았던 마음이 또다시 파도처럼 요동쳤다.
- 간밤의 그 미친 듯한 정사가 끝난 뒤 나를 부서질세라 꽉 끌어안던 그 품에 안겨, 나는 다시금 그가 애지중지하는 유일한 보석으로 전락했었다.
- 그리고 남자는, 오래전 나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던 다정한 강세혁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 모레면 이 모든 걸 영영 뒤로하고 떠나야 하는데, 과연 나는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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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 이 아침부터 짐 싸느라 바쁘네. 드디어 주제 파악하고 방 빼기로 한 거야?"
- 소름 끼치도록 가증스러운 혜주의 목소리가 상념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 속에서 시궁창 같은 구역질이 확 치밀어 올랐다.
- "꺼져. 여긴 너 따위가 함부로 기어들어 올 곳 아니니까."
- 하지만 그녀는 내 경고를 벌레 윙윙거리는 소리쯤으로 치부하며 뻔뻔하게 중얼거렸다.
- "참나, 불쌍한 언니 집 구경 좀 하겠다는데 문전박대를 하네."
- 혜주는 요란한 하이힐 소리를 내며 거침없이 작업실을 짓밟고 들어와, 내 소중한 캔버스들을 향해 함부로 손을 뻗었다.
- 날카롭게 벼린 그녀의 긴 손톱이 캔버스 표면을 긁고 지나가자, 칠판을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그 더러운 손 당장 안 치워?!"
- 내가 서슬 퍼렇게 호통쳤다.
- "이 쓰레기 같은 것들 언니가 그린 거야?"
- 혜주가 과장되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아무도 언니한테 실력이 눈 뜨고 못 봐줄 수준이라고 말 안 해 줬어? 쯧쯧."
- 그러고는 구두코를 쳐들어 벽에 기대어 둔 캔버스를 무자비하게 걷어차 버렸다.
- 눈이 뒤집힌 내가 달려들어 그녀를 확 밀쳐내자 혜주가 벽에 쿵 하고 부딪혔지만, 그녀는 기가 죽기는커녕 발작하듯 웃었다.
- "사랑받지 못하는 년은 이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싸구려 물감 장난이나 치는구나."
- "내가 세혁 오빠랑 데이트하면서 뒹굴 때, 언니는 이딴 거나 그리면서 질질 짰겠지?"
- "눈치껏 알아서 빨리 꺼져. 세혁 오빠는 이제 내 거니까."
- 혜주가 팔을 거칠게 휘두르자,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액자들이 우당탕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 짧은 비명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액자의 프레임이 와그작 부서지며 날카로운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 포장 작업을 하던 인부들은 살벌한 기싸움에 놀라 하던 일을 멈추고 쩔쩔매고 있었다.
- 작업반장이 진땀을 빼며 눈치를 보았다.
- "두 분 대화 나누시지요. 저희는 일단 짐부터 차에 싣고 오겠습니다…"
- "잠깐만요! 저 자화상까지만 마저 박스에 넣어주시고…!" 내가 다급히 손을 뻗었다.
- 그러나 똥 밟았다는 듯 재빨리 상자를 들고 도망치듯 빠져나간 인부들은 이미 연기처럼 사라지고 난 뒤였다.
- 혜주가 독사처럼 스멀스멀 다가와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 "엄마 아빠가 그러더라. 강민그룹이랑 백연그룹 결혼은 그대로 갈 거라고. 다만… 신부가 나로 바뀔 뿐이지."
- 나는 산산조각 난 캔버스를 쓸어 안으며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 "그래, 잘됐네. 두 쓰레기의 결합을 진심으로 축하해 줄게."
- 나는 삼류 코미디라도 구경하듯, 나른하고 조소 섞인 목소리로 비웃어 주었다.
- 순간 혜주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발악하며 매달릴 줄 알았던 모양이지.
- "너… 그게 무슨 뜻이야?"
- 나는 실소를 터뜨렸다.
- "너 원래부터 내가 쓰다 버린 거 줍는 데 취미 있었잖아, 안 그래?"
- "강세혁은 내가 버린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니까, 네 취향이면 평생 안고 살아."
- 제대로 발작 버튼이 눌린 혜주가 악에 받친 비명을 지르며 벽에 세워둔 화구들을 향해 미친 듯이 발길질을 해댔다.
- "이 미친년이!"
- 등줄기에 오싹한 한기가 뻗쳐 올랐고,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캔버스 앞을 막아서며 그녀를 거칠게 밀어냈다.
- 강세혁이 없으니 가련한 여동생 코스프레도 집어치운 그녀가 완전히 이성을 잃고 내 머리채를 향해 달려들었다.
- "당장 안 꺼져?! 더 쳐맞기 전에 좋은 말로 할 때 굴러가라고!"
- 나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 씩씩대던 혜주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커터 칼을 콱 움켜쥐더니, 번뜩이는 살기를 띠며 칼날을 쑥 뽑아 들었다.
- "씨발, 어디 한 번 쳐 보시지?"
- 섬뜩한 칼끝을 피해 황급히 뒷걸음질 쳤고, 독기가 바짝 오른 혜주가 나를 향해 덤벼들던 바로 그 순간, 그녀의 구두 굽이 바닥에 나뒹굴던 이젤 다리에 쾅 하고 걸려버렸다.
- 중심을 잃은 그녀의 몸이, 가장 튼튼하게 포장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던 내 '자화상' 위로 흉하게 고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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