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혜린은 내가 좋아하는 그 빨간, 조그마한 란제리만 입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레이스는 거의 숨길 게 없었고, 걘 그걸 나무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서랍 쪽으로 몸을 숙였다. 내가 한다은과 함께 찍은 웨딩 사진을 몰래 집어넣어둔 바로 그 서랍이었다. 그리고 화장품 파우치를 꺼내더니 익숙한 손놀림으로 천천히 눈썹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 좀 찜찜해.”
그녀가 갑자기 말하며 몸을 반쯤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응.”
나는 대충 대답했다. 휴대폰으로 메일을 넘기며 숫자, 마감, 계약서 같은 것들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잔소리에 신경 쓰는 것보다 그게 훨씬 쉬웠다.
그녀가 말문을 닫았다. 처음엔 알아채지 못했는데 우리 사이에 뻑뻑한 침묵이 흐르더니 고개를 겨우 들었을 때, 그녀는 마치 토라진 아이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미안, 자기야”
과장된 한숨과 함께 휴대폰을 무심히 던지며 중얼거렸다. 늘 통했던 표정을 지으며서 미안한 척, 살짝 죄책감 어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녀는 언제나 녹아내리니까.
“아까 뭐라고 했지?”
그녀가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양팔을 가슴 밑으로 모아 더 돋보이게 했고 전형적인 서혜린의 매력이 뚝뚝 떨어졌다. 나랑 말다툼을 하면서도 유혹은 절대 멈추지 않는 그녀였다.
“가끔은 당신이 내 몸만 사랑하는 것 같아.”
그녀가 입술을 꼬집으며 시선을 아래로 흘리면서 막장 드라마 오디션 보는 배우처럼 떨리는 입술로 중얼거렸다.
나는 눈을 굴릴 뻔했다. 또 시작이네.
대신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췄다.
“그건 상처받을 말이다.” 상한 자존심이 배어 나온 톤으로.
“왜 그런 말을 해? 네 몸이 멋진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다은을 버리고 너한테 왔겠어?”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사르르 풀렸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미안해.”
그녀가 속삭였다.
“그냥… 괜히 불안했어.”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손등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비록 나한테는 1도 비용 안 드는 제스처지만.
“괜한 걱정 말라니까. 넌 내가 원하는 전부야.”
그녀가 안도하는 미소를 머금고 다시 일어나서 화장품을 마저 발랐다.
“그래… 아무튼 아까 하려던 말은...좀 미안했어. 어젯밤 내가 좀 심했던 것 같아. 그냥 네가 너무 안쓰러워서 그랬거든.”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나는 침대 머리판에 몸을 기댔다. 어젯밤 한다은의 놀란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볼에서 피가 쫙 빠지는 순간, 진실이 꽂히자 눈이 커지던 그 표정.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 밑바닥엔, 그녀가 무너지는 걸 보는 나만의 이상한 쾌감도 섞여 있었다.
“아니야, 과한 거 하나도 없어.”
나는 서둘러 부드럽게 말했다.
서혜린은 눈썹 펜슬을 내려놓고 머리를 살짝 만지며 안도하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당신이 말했잖아. 그 여자는 못된 아내라고. 욕심 많고, 이기적이고, 뭐 그런 거. 근데 어제 보니까 너무 순해 보이더라. 눈가가 젖는 거 보니까 진짜 미안해지더라니까.”
그 말에 귀가 쫑긋 섰다. 몸을 조금 세웠다.
“울었어?”
“막 엉엉 운 건 아니고.” 서혜린이 급히 정정했다.
“근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어. 솔직히… 내가 미리 모르고 봤으면 진짜 천사 같은 애인 줄 알았겠다. 그렇게 나쁜 짓 할 사람처럼 안 보이던데.”
가슴 안에서 기묘한 쾌감이 뒤틀렸다. 한다은이 나 때문에 울 뻔했다고. 한심하지.
“천사라니?” 내가 비죽 웃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후려친 건 못 봤잖아. 1초도 안 망설였지. 내가 매일 그런 걸 겪었다고. 난 여자 안 때려. 근데 한다은은? 손이 올라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서혜린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손질된 손이 입술 쪽으로 올라갔다. 곧 표정이 연민으로 풀렸다. 그녀가 애교 섞인 소리를 내며 내 볼에 입을 맞췄다.
“아이고, 자기야. 걱정 마. 우리 결혼하면 다 나아질 거야. 내가 당신 챙길게.”
그말 듣고 보니 나는 웃었다. 그녀와 결혼한다는 생각만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그녀가 블라우스를 잠갔다. 방금 전까지 내가 즐기던 몸을 다시 가렸다. 아쉬울 수밖에 없지. 낮에 나가려 할 때마다 그녀의 가장 좋은 부분은 늘 가려졌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공중에 향수를 칙 뿌렸다. 괜히 잘 보이려고 10대처럼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난 끝까지 연기했다. 문까지 바래다 줬다.
“그래서...”
그녀가 치마를 정리하며 비웃듯 말했다.
“오늘 대표님은 회사 안 가? 나쁜 남자네.”
나는 작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가끔은 대표님도 뒹굴 권리가 있지. 뭐랄까… 스트레스 풀린걸로?”
그녀가 웃으며 한 번 더 키스했고 드디어 아파트를 나갔다.
문이 딸깍 닫히는 순간, 내 미소도 싹 사라졌다.
조금만 더, 그녀 아버지가 계약서에 사인할 때까지만. 그다음부터… 그녀는 그저 짐덩어리일 뿐이었다.
“우리 결혼하면…”
그녀 말이 머릿속에서 다시 메아리쳤다. 소름이 돋았다. 절대 아니었다. 지금도 간신히 참아 내는 중인데. 밥 한 끼 제대로 못 한다고 내가 왜 한다은 대신 그녀를 택하겠어?
한다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어젯밤 집에 안 왔다. 아마 아직도 토라져 있을 거다. 늘 오버하잖아.
나는 짜증 섞인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녀 손이 내 뺨을 때리던 기억은 아직도 따갑게 남아 있었다. 따끔한 통증과 둘러선 사람들의 일제히 터진 탄성...완전 망신이었다.
근데 그녀 눈에는 다른 것도 있었다. 화뿐 아니라 아픔도 있었다.
적어도 동료들 앞에서 날 때릴 배짱은 있었다는 거니까. 창피하긴 했지만, 그래도 용서해 줄 거다. 이번 한 번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픈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