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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다음 날 아침

  • 한다은 시점
  • 눈 뒤에서 쿵쿵 울리는 두통 속에 나는 겨우 눈을 떴다.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벌 받는 기분이었다. 목은 사포로 문지른 듯 바짝 말라 있었다. 크림색 커튼 사이로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스며들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 한참 후에야 비로소 내가 누워 있는 방의 숨 막힐 듯한 아름다움을 지각했다.
  • 천장은 높고, 은은한 상아색이 아침 햇살 아래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벽은 따뜻한 베이지톤에 금빛 포인트가 은은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머리 위에는 과하지 않으면서도 세련된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는데, 마치 인터넷에서 보던 고급 호텔 카탈로그 속 한 장면 같았다. 내가 누운 침대는 어마어마하게 컸고, 시트는 평생 써 본 것 중 가장 부드러웠다.
  • 방 안에는 은은한 백단향과 갓 세탁한 린넨 향이 가득 퍼져 있었다.
  • 예쁘고, 고급스럽고, 완전 낯선 공간이었다.
  • 나는 벌떡 일어났다가 곧 후회했다. 머리를 번개처럼 찌르는 통증이 엄습해 숨이 턱 막혔고, 나는 이마를 꽉 움켜쥐었다.
  • 어젯밤 기억들이 무자비한 밀물처럼 밀려왔다.
  • 배신, 파티장에서 받은 모욕, 태연한 척 애쓰다가 혼자 남자 와르르 무너진 나.
  • 그리고…
  • 밤거리, 바, 끝없이 비워낸 병들,
  • 전화 너머로 들려오던 비비의 목소리.
  • 비비...가슴이 조여 왔다.
  • 내려다보니 낯선 분홍빛 실크 파자마가 몸을 감싸고 있었다. 내 옷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파자마는 너무 예뻐서 내 것이 될 수 없었다.
  •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세상에, 비비가… 나를 갈아입혀 준 건가?
  • 수치심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절로 새어 나오는 신음을 들었다.
  • 문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숨기다가 딱 들킨 아이처럼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렸다.
  • 문이 열리자, 날씬하고 단정한 블랙앤화이트 유니폼을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머리는 매끈하게 올려 묶은 채, 물 한 잔과 알약 두 알이 담긴 쟁반을 들고 있었다.
  •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 그녀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 “저는 세린이라고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긴 안전해요. 어젯밤 갈아입히는 건 제가 했어요. 다른 사람은 손도 대지 않았으니 안심하세요.”
  • 나는 이불에 푹 기대 앉아 안도와 민망함이 뒤섞인 숨을 내쉬었다.
  • “아… 다행이다.”
  • “어젯밤 꽤 많이 드셨더라고요.”
  • 그녀가 조용히 쟁반을 협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 “이거 드시면 두통이 좀 나아질 거예요.”
  • 나는 얼른 알약을 삼키며 작게 “고마워요”라고 중얼거렸고 곧 다시 부드러운 침대에 몸을 묻었다.
  • 세린이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계세요.”
  •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누구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세린은 자리를 떴다. 나는 이불을 더 끌어올려 눈만 겨우 내밀었다. 아마도 조금 딱해 보인다면 그가 나를 판단하기보다 불쌍히 여길 거라 믿었다.
  • 몇 분 뒤, 문이 다시 열렸다.
  • 윤태혁. 비비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 키가 커서 문틀에 살짝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의 완벽한 비율을 자랑하는 큰 몸은 이 방에서는 다소 과하게 느껴졌다. 나는 숨이 턱 막힐 듯 그를 훑어보았다. 참… 어떤 것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법이다.
  • 그 존재감. 방 구석구석까지 가득 채워 버려 안전하다고도 갇힌 듯한 느낌이었다.
  • 순간, 거의 새어 나올 뻔한 그 웃음에 그리움이 살짝 스쳤다.
  • 그가 나를 한 번 바라보았고, 그 눈빛 속에 스친 걱정이 마법처럼 내 눈물을 다시 흘리게 했다.
  • 그는 턱을 굳게 다물고 나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 나는 옆에 있던 베개를 집어 그의 가슴팍으로 냉큼 던졌다.
  • “뭐야! 나 놀리러 온가야? 어젯밤 내 꼴 진짜 볼 만했겠지!”
  • 베개는 그의 수트에 툭 맞고 힘없이 튕겨 나갔다. 그의 표정은 거희 변하지 않았지만 아주 미세하게 얼굴이 찡그려졌다. 마치 내 말이 베개보다 더 깊게 박힌 것처럼.
  • “다니…”
  • “다니란 소리 하지 마.”
  • 나는 목소리가 갈라진 듯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 “나 완전히 만취해서 남들 앞에서 울고 네 앞에서 망신당했어. 축하해. 재밌게 봤겠지!”
  • 나는 멈추지 않았다. 분노가 마치 터진 둑처럼 차올라 쏟아졌다. 가슴 아픈 것보다 화내는 게 훨씬 쉬웠다.
  • “집에 가서 생각했겠지. ‘와, 얘 진짜 나 없으니까 산산조각 났네. 불쌍하다.’ 그게 네가 원한 거 아니야? 내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걸 보는 거지?”
  • 그는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한마디도 하지 않고 손은 옆으로 내려져 있었으며 눈은 한시도 내 눈에서 떼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비비답게.
  • 그래서 나는 더 화가 났다.
  • “뭐라도 말해! 내가 웃기다고 해도 좋으니까 상관없으니, 아니면—”
  • “앉아도 될까?”
  • 그가 낮게 물었다.
  • 말문이 막혀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 “마음대로 해.”
  • 나는 투덜거리며 얼굴을 돌렸다. 사실은 그가 떠나지 않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었다.
  • 그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앉아만 있어도 잡지 화보에서 튀어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진한 차콜 컬러의 수트는 내 한 달 월세보다 훨씬 비싸 보였고, 셔츠는 빳빳했으며, 타이는 매듭 하나 흐트러짐 없이 깔끔했다. 짙은 머리는 아무렇게나 넘긴 듯해도 단정했고, 은은하면서도 따뜻한 향수가 그의 뒤를 감쌌다. 긴 다리를 느긋하게 뻗은 채, 온몸에서 ‘파워’와 ‘컨트롤’이라는 단어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 반면 나는 이불 속에 돌돌 말려 애처럼 숨고 있었다. 내 모습은 정말 완벽하게 그랬다.
  • 그가 한 손을 들어 내게 내밀었다. 닿진 않았지만 조용히 손을 내밀고 내가 선택하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마치 선택지를 내미는 사람처럼.
  • 그를 무시하고 싶었지만, 몸은 나를 배신했다. 조금씩, 아주 서서히 내 몸이 그의 쪽으로 다가갔고 떨리는 손끝이 그의 손끝을 스쳤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나는 그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 눈물은 더욱 거세졌지만, 내 몸은 그의 품에서 풀어졌다. 그 따뜻한 온기가 내 몸속 깊이 새겨진 것처럼, 마치 시간이 한순간도 흐르지 않은 듯했다.
  • “다 말해 줘.”그가 낮게 속삭였다.
  • 그 목소리는 강요도, 비웃음도 아닌, 한결같이 단단한 말투였다. 그 한마디에 내 안의 무언가가 또 한 번 와장창 부서져 내리는 것 같았다.
  • 나는 훌쩍이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 “너도 알잖아. 나는 믿었어. 그 사람들을 믿었고, 그 사람을 믿었어.
  •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나를 바보로 만들었어.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했는데, 난—”
  • 말은 흐느낌 속에 사라졌다.
  • “너는 소중해.”
  • 그가 단호하게 말하며 팔을 더 꽉 조였다.
  • “아니야! 그들에게는 아니야!”
  • 나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 “그들에겐 나는… 버려도 되는, 그냥 구경거리 같은 사람이야.”
  • 그의 턱 근육이 한 번 긴장하며 움직였다. 말하지 않은 말들이 그의 침묵 속에 무겁게 걸려 있었다.
  • 나는 얼굴을 살짝 떼어내 눈물 맺힌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 “그리고 너도 다 봤지? 내가 불쌍한 꼴을 보고 통쾌했겠지.”
  •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 속에는 고통이 스쳤다.
  • “다은아, 네가 상처받는 모습을 보고 통쾌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어.”
  • 나는 입술을 깨물며 갑자기 확 자신이 없어지고, 나조차도 싫어질 만큼 나약한 모습이었다.
  • “그럼 왜 온 거야?”
  • 그가 가까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네가 내 이름을 불렀으니까.”
  • 숨이 턱 막혔다.
  • 어젯밤 취한 어지러움 속에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진실이 우리 사이에 떨어졌고, 부인할 수 없었다.
  • 나는 그를 불렀다. 세상 누구도 아닌, 내가 바닥을 칠 때 가장 먼저 입 밖으로 내뱉은 이름은 바로 그의 이름이었다.
  • 그리고 그는 왔다.
  • 나는 그의 눈을 마주볼 수 없었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 그가 다시 손을 뻗어 내 얼굴 사이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한 올을 걷어 주었다.
  • “그래서… 다 말해 줄래? 아니면 내가 맞혀 볼까?”
  • 나도 모르게 가냘픈 웃음이 새어 나왔다.
  • “맞혀 본다고? 다 틀릴 걸.”
  • “한번 해봐.”
  • 그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여전히 진지한 눈빛을 보냈다.
  • 오랜만에 처음으로, 나는 그에게 몸을 기대며 천천히 모든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