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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 사흘 뒤.
  • 논현동 고급 주택가에 자리한 최고급 개인 저택 앞.
  • 이하은은 문 앞에 서 있었다. 차가운 바람에 코끝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 집사가 신재한에게 방문 사실을 알리자, 묵직한 대문이하은 씨옆으로 천천히 열렸다.
  • 하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집사의 뒤를 따라 굳은 걸음으로 정원 안에 들어섰다.
  • 거실 통창 앞에 서 있는 신재한의 뒷모습을 보자, 문득 발길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 자신처럼 보잘것없는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서울에서 가장 힘 있는 인물에게 부탁을 할 수 있겠는가?
  • 하지만 조채아를 떠올리자, 하은은 억지로 용기를 조금 끌어냈다.
  • 하은은 허리를 숙여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 “신 회장님.”
  • 목소리를 들은 신재한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 그의 검은 눈동자가 하은의 정수리 위로 내려앉았다. 목소리는 차갑고 조금의 온기도 없었다.
  • “무슨 일이죠?”
  • 하은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신 회장님, 저는 이하은이라고 합니다. 강 씨 댁에서 일하면서 준환이와 민민이를 돌보고 있어요.”
  • 신재한의 눈 깊은 곳에서 순간 초록빛이 스쳤다.
  • “그래요, 이름은 알고 있어요. 이하은 씨.”
  • 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하은은 등골을 타고 은밀하게 번지는 전율을 느꼈다.
  • 그가 방금 이름을 부를 때, 유독 목소리에 힘을 준 듯했다.
  • 마치 그 이름이 그에게 특별한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 하은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 “갑작스럽게 찾아와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오늘 이렇게 찾아온 건 제 친구 조채아 때문이에요.”
  • 말이 끝나자마자 신재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 하은은 긴장한 채 최대한 진심이 느껴지도록 말을 골랐다.
  • “신 회장님의 개인 샘플이 난임센터에서 사라져서 채아에게 책임을 묻고 계신다는 걸 알고 있어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채아는 분명히 무고해요.”
  • “채아는 자기 일을 늘 책임감 있게 해 왔어요. 자기 인생을 망칠 만한 일을 저지를 사람은 절대 아니에요.”
  • “그러니 부탁드릴게요…… 한 번만 더 확인해 주실 수 없을까요?”
  • 하은의 목소리는 작았고,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사람 특유의 위축감이 묻어 있었다.
  • 하은의 뺨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 민감한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 자신이 말을 잘못 꺼내 조채아를 더 깊은 곤경에 빠뜨릴까 두려웠다.
  • 신재한은 위에서 내려다보듯 하은을 바라보았다.
  • 깊이를 알 수 없는 두 눈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 시선은 숨이 막힐 만큼 무거웠다.
  •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얇은 입술을 열었다. 목소리는 차가웠고, 반박을 허용하지 않았다.
  • “내가 파악한 바로는 당신 친구가 저지른 과실은 매우 심각합니다. 지금 내려진 조치도 충분히 합리적이고요. 그 친구가 해야 할 일은 자기 잘못을 책임지는 거지, 당신이 대신 와서 선처를 구하는 게 아닐 텐데요.”
  • 하은은 다급하게 해명했다.
  • “아니에요! 제가 여기 온다는 사실도 채아는 몰라요!”
  • “이 일에 대한 내 결정은 바뀌지 않습니다.”
  • 신재한은 그 말만 남기고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 하은이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집사가 말을 끊었다.
  • “이하은 씨, 저희 회장님의 뜻은 이미 분명해졌습니다.”
  • 집사는 손으로 나가라는 듯한 몸짓을 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어조로 덧붙였다.
  • “솔직히 말씀드리면, 회장님께서 그나마 관대하신 걸 다행으로 여기셔야 합니다. 계속 여기 머무르시면 기밀을 유출한 그 친구의 처지는 더 나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 하은은 계단 위에 서 있는 넓은 어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 다음 날 아침.
  • 하은은 평소처럼 고용주의 집으로 출근했다.
  • 하지만 출입 카드를 몇 번이나 대 보아도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 의아해진 하은은 문을 두드렸다.
  • 1분쯤 지나 강준환의 어머니 윤미숙이 차가운 얼굴로 문을 열었다.
  • 그녀는 혐오스럽다는 듯 하은을 훑어보더니 싸늘하게 말했다.
  • “이하은 씨, 오늘부로 해고예요.”
  • 하은은 잠시 멍해졌다.
  • 미간을 좁힌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 “저를 해고하신다고요? 왜요? 저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 “잘못이 없다고요?”
  • 윤미숙이 비웃었다.
  • “며칠 전 우리 준환이를 돌보다가 아이가 차도로 뛰어들게 내버려 둬서 하마터면 교통사고가 날 뻔했잖아요! 게다가 어제는 신 회장님 댁까지 찾아가 그분을 귀찮게 했다는 사람도 있어요.”
  • “사모님, 그런 게 아니에요.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 윤미숙은 하은의 말을 잘랐다. 태도는 단호했다.
  • “변명은 듣고 싶지 않아요.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어요!”
  • 하은은 더는 상황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 마지막 기대를 품고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 “그럼 아이들과 제대로 작별 인사라도 나누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 “안 나가겠다는 거예요? 지금 당장 경찰에 신고하겠어요!”
  • 윤미숙은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걸려 했다.
  • 하은은 재빨리 한 걸음 물러서며 그녀를 말렸다.
  • “사모님, 신고하지 않으셔도 돼요. 지금 바로 나갈게요.”
  • 말을 마친 하은은 저택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 길가를 걷던 하은은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 일자리를 잃어서 우는 게 아니었다. 두 아이와 제대로 작별 인사를 나누지 못한 것이 슬펐다.
  • 2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하은은 이미 두 아이에게 정이 깊이 들었다.
  • 하은은 붉어진 코를 훌쩍이며 흐느꼈다.
  • 그녀는 이번 일이 신재한과 분명 관련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 신재한은 조채아에게 했던 방식 그대로, 자신에게도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 하은의 오른손이 무의식적으로 평평한 아랫배 위에 얹혔다.
  • 그녀는 모아 둔 돈을 전부 인공수정 시술에 썼다. 이제 직장까지 잃었으니 수입도 끊긴 셈이었다.
  • 정말 임신했다면, 앞으로 들어갈 모든 비용을 대체 무슨 돈으로 감당해야 할까?
  • 하은은 집으로 돌아오자 우편함에 낯선 청구서가 가득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 손끝을 떨며 하나씩 꺼내 펼쳐 보았다.
  • 모두 박민우가 즐겨 찾던 몇몇 명품 브랜드의 청구서였다.
  • 설마 이 모든 것이 그가 줄곧 숨겨 온 빚이란 말인가?
  • 하은은 벽에 몸을 기댄 채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 박민우의 성격을 잘 아는 그녀는, 청구서를 그의 얼굴에 들이밀어도 그가 인정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