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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 한 시간 후.
  • 이하은은 호화로우면서도 낯익은 거실을 바라보며 복잡한 심경에 빠졌다.
  • 분명 협력을 먼저 제안한 건 자신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주도권은 모조리 신재한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 그 남자는 지나치게 강압적이었다. 언제나 그녀의 생각을 손쉽게 뒤흔들어 놓았다.
  • 하지만 침실에 들어선 순간, 이하은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 방 안에는 은은한 방향제 향기가 감돌았다.
  • 욕실과 실내 인테리어는 모두 임산부가 지내기에 가장 적합하도록 바뀌어 있었다.
  • 구석에는 간식과 음료는 물론 물리치료 기기까지 갖춰져 있어, 최고급 개인 휴양 시설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 이하은은 고개를 들어 신재한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 “이것들…… 전부 저를 위해 준비하신 거예요?”
  • 신재한은 돌아보지 않은 채 담담하게 대답했다.
  • “임신 기간에 지내는 환경은 안전해야 하니까.”
  • 이하은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 이 모든 배려가 뱃속의 아이를 위한 것임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 그때 신재한이 작고 금빛으로 빛나는 방울 하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 “받아.”
  • 이하은은 잠시 어리둥절해했다.
  • 섬세하게 세공된 방울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 “이게 뭐예요?”
  • “필요한 게 있거나 몸이 불편하면 언제든 흔들어.”
  • 신재한은 그녀의 손을 잡아 방울을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 “소리가 들리면 최대한 빨리 네 곁으로 갈 테니까.”
  • 이하은은 손을 거두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 “저택 안에서는 어디든 자유롭게 다녀도 돼.”
  • 신재한은 그녀가 불편해하는 기색을 알아차리고 부드럽게 덧붙였다.
  • “앞으로 여섯 달 동안은 최대한 즐겁고 편안하게 지내도록 해.”
  • 이하은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 “여섯 달이요?”
  • “그래.”
  • 신재한은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설명했다.
  • “늑대족의 임신 기간은 인간보다 짧아. 대략 여섯 달이면 출산을 앞둔 상태가 되지. 전에 태아 검사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나왔던 것도 그 때문이야.”
  • 이하은의 마음속에 문득 불안이 밀려왔다.
  • 여섯 달 후면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판결을 마주해야 했다.
  • 그녀는 신재한이 너무 일찍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지 않기를,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아이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속으로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었다.
  • 위이잉—
  • 갑자기 휴대전화 진동음이 다급하게 울렸다.
  • 신재한은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에 뜬 메시지를 확인했다.
  • 메시지를 읽은 그는 고개를 들어 이하은을 바라보았다.
  • “잠깐 쉬고 있어. 서재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좀 있어.”
  • “네.”
  • 방문이 닫히자 방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 이하은은 낯선 주변을 둘러보다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 겨울의 찬바람이 안으로 밀려들며 달아올랐던 마음을 조금 가라앉혀 주었다.
  • 아래 정원에서는 건장한 체격의 검은 옷차림 경호원 수십 명이 단체 훈련을 하고 있었다.
  • 엄숙하고 일사불란한 구령과 발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 이하은은 손바닥에 놓인 방울을 내려다보았다.
  • 겉보기에는 평범한 이 방울이 정말 신재한을 불러올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 그녀가 손끝을 살짝 움직이자 방울에서 맑은 소리가 울렸다.
  • 불과 30초가 지났을 뿐인데 신재한이 다시 방 안에 나타났다.
  • 그의 눈가에는 희미한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그녀의 유치한 시험을 이미 간파한 듯했다.
  • “무슨 일이야?”
  • 이하은은 아래쪽 훈련장을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부탁했다.
  • “저 사람들 훈련 장소를 바꿔 주실 수 있나요? 소음이 너무 커서 쉴 수가 없어요.”
  • 신재한은 망설임 없이 몸을 숙여 창밖을 향해 말했다.
  • “장소를 옮겨. 조용히 하는 것도 잊지 말고.”
  • 다음 순간, 경호원들은 일제히 공손하게 대답한 뒤 재빨리 그곳을 떠났다.
  • 이하은은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며 복잡한 심경에 잠겼다.
  • 재벌 가문의 실권자인 신재한은 어떤 상황에서든 손쉽게 모든 것을 통제하는 사람 같았다.
  • 그녀는 조용히 감사 인사를 건넸다.
  • “감사합니다.”
  • 신재한은 그녀를 바라보지 않은 채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 그는 이미 사설 정보팀에 이하은의 과거를 샅샅이 조사하라고 지시해 둔 상태였다.
  • 머지않아 그녀가 자신에게 접근한 진짜 목적을 알아낼 수 있을 터였다.
  • 이틀 후.
  • 신씨 그룹 회장실에서 신재한은 사무용 의자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 펼쳐 놓은 서류에 시선은 두고 있었지만, 글자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신재한은 자신의 자제력이 매우 강하다고 늘 믿어 왔다. 사적인 일 때문에 업무에 감정이 흔들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그런데 지난 이틀 동안은 자꾸만 이하은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 한눈에 진심을 읽어 낼 수 있을 만큼 맑은 그녀의 눈동자. 한때 다정한 척하다가 자신을 배신했던 운명의 반려 서예나와는 완전히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