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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의 아빠는 늑대였다

내 아이의 아빠는 늑대였다

Caroline Above Story

Last update: 1970-01-01

제1화

  • 서울, 강남구.
  • 이하은은 넋이 나간 얼굴로 종합병원을 나섰다.
  • 손에 쥔 진단서를 어찌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 의사의 차분하면서도 잔인한 선고가 귓가에 끊임없이 맴돌았다.
  • “이하은 씨, 올해 나이가 겨우 스물아홉이시지만 난소 예비력 수치는 마흔다섯 살 이상 여성과 비슷합니다. 자연 임신 가능성도 극히 낮고요.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이제 단 한 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 “아이를 원하신다면 이번 생리 주기가 끝나기 전에 반드시 임신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영 어머니가 될 기회를 잃게 되실 겁니다.”
  • 차갑기 그지없는 진단에 하은의 가슴속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희망마저 무너져 내렸다.
  • 그녀는 남자 친구 박민우와 3년째 연애 중이었다. 두 사람은 줄곧 임신을 준비하며 자신들을 닮은 아이를 품에 안을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 그런데 이제 와서…….
  • 하은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고, 떨리는 손으로 진단서를 가방에 넣었다.
  •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 민우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 20분 뒤, 택시는 고급 주거용 아파트 앞에 멈춰 섰다.
  • 하은은 차에서 내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하지만 현관문을 여는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 현관 신발장 위에 낯선 하이힐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명품 가방이 보였다.
  • 오지윤의 것이었다.
  •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라고 믿었던 여자.
  • 그때 침실 쪽에서 묘하면서도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마치 얼음 송곳으로 귓속을 찌르는 듯했다.
  • 하은은 속이 뒤집히는 기분에 입술을 깨물었다.
  •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침실 안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 “오빠, 이하은 진짜 바보 같지 않아?”
  • 지윤이 비웃으며 말했다.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경멸이 담겨 있었다.
  • “아직도 오빠가 자기랑 결혼해서 애까지 낳아 줄 거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잖아.”
  • “걔가 예쁘고, 얌전하고, 내 말도 잘 들으니까 지금까지 만난 거지. 안 그랬으면 진작 헤어졌어.”
  • 박민우가 비아냥거렸다.
  • “다행히 매일 걔가 좋아하는 국이랑 죽에 피임약을 몰래 타 놨거든. 안 그랬으면 진짜 임신해서 나한테 들러붙었을지도 모르지.”
  • “아! 오빠…… 살살…… 너무 깊어…….”
  • 오지윤의 나른한 신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 그 순간, 지난 3년 동안 하은의 마음속에 쌓여 있던 모든 의문이 풀렸다.
  • 민우와 피임도 하지 않은 채 관계를 맺어 왔는데도, 그녀는 단 한 번도 임신하지 못했다.
  • 운이 나빴던 게 아니었다.
  • 사랑하는 남자 친구가 직접 그녀의 소망을 짓밟고 있었던 것이다.
  • 장기간 피임약을 몰래 복용하게 만든 탓에 생식 기능까지 손상되었고, 결국 스물아홉 살인 그녀의 난소는 마흔다섯 살 이상 여성의 상태가 되어 버렸다.
  • 분노와 절망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하은의 호흡은 점점 가빠졌다.
  • 더는 냉정을 유지할 수 없었던 그녀는 벽에 설치된 화재경보기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 다음 순간, 날카로운 경보음이 아파트 전체를 뒤흔들었다.
  • 천장의 스프링클러까지 작동하면서 사방으로 물줄기가 쏟아졌다.
  • “꺄악!”
  • 침실에서 뒤엉켜 있던 두 사람이 비명을 질렀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옷매무새가 엉망이 된 민우와 지윤이 허둥지둥 뛰쳐나왔다.
  • 현관에 서 있는 하은과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 민우는 침을 꿀꺽 삼킨 뒤, 억지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 “하은아…… 너, 너 왜 이렇게 일찍 왔어?”
  • 그는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찾았다.
  • “지윤이가 네 생일 깜짝 이벤트를 준비하는 걸 도와주러 온 거야. 그런데 실수로 주스를 쏟아서 옷이 젖었어. 그래서 이렇게 구겨진 거고…….”
  • “응.”
  • 하은은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이런 상황에서도 저 뻔뻔한 변명으로 자신을 속이려 하다니.
  • 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 아마 저 두 사람에게 자신은 진심을 마음대로 짓밟아도 되는 어리석은 여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 하은은 억지로 감정을 억누른 채 적당한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떠났다.
  • 아파트를 빠져나온 그녀는 잔뜩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 박민우, 네가 저지른 짓을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 하은은 휴대전화를 꺼내 연락처 목록을 한참 동안 훑어보았다.
  • 그리고 마침내 이곳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떠올렸다.
  • 조채아.
  • 하은과 채아는 어린 시절부터 고아원에서 함께 자랐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친자매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 현재 채아는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최고급 사립 난임센터에서 일하는 전문의였다.
  • 과거의 하은은 인공수정 같은 방법으로 아이를 갖게 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 하지만 연인의 배신을 겪은 지금, 그녀는 더 이상 어떤 남자도 믿을 수 없었다.
  • 어머니가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 이번만큼은 자신의 힘으로 붙잡기로 했다.
  • 저축해 둔 돈은 많지 않았지만, 인공수정 시술을 한 번 받기에는 충분했다.
  • 난임센터의 전용 진료실.
  • 하은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채아는 분노로 온몸을 떨었다.
  • “박민우, 그 개자식이 감히 너한테 그런 짓을 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 채아는 정신적으로 무너져 내린 하은을 꼭 끌어안고 다정하게 달랬다.
  • “하은아, 의사 선생님 말씀이 맞아. 너한테는 아직 임신할 기회가 단 한 번 남아 있어.”
  • 하은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목소리도 가늘게 떨렸다.
  • “나도 알고 있어요. 언니, 내 인생에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아요. 여기 있는 기증자 정자 중에서 가장 좋은 걸로 몇 명 골라 줄 수 있어요? 나도 한번 시도해 보고 싶어요.”
  • 이곳은 서울에서 가장 권위 있고 보안 수준도 높은 최고급 사립 난임센터였다.
  • 정자 기증자는 모두 사회 최상위층의 엘리트들이었으며, 개인 정보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 “걱정하지 마. 여기 기증자들은 전부 엄선된 사람들이야.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은 없다고 보면 돼.”
  • 채아는 출입문 쪽을 힐끗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어딘가 비밀스러운 표정이었다.
  • “하은아, 내가 너한테만 살짝 알려 줄 게 있어. 바로 신재한 회장님 말이야. 신씨 그룹의 회장님도 우리 센터에 정자 샘플을 보관해 두셨어.”
  • 그 이름을 듣는 순간, 하은은 숨을 멈칫했다.
  • 신재한?
  •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재벌 가문의 후계자 아닌가?
  • 하은은 논현동의 고급 단독주택 단지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보모로 일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가끔 신재한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 그는 언제나 맞춤 제작한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냉혹하고 날카로운 기세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남자였다.
  • 멀리서 한 번 바라보기만 해도 어쩐지 숨이 막힐 정도였다.
  • “선천적으로 생식 능력에 문제가 있어서 몰래 샘플을 보관해 두셨다고 들었어.”
  • 채아는 긴장한 얼굴로 거듭 당부했다.
  • “절대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 이건 철저히 비밀로 관리되는 내부 정보야!”
  • 하은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어. 절대 말하지 않을게.”
  • 그제야 채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엘리트 기증자들의 정보가 담긴 자료집을 건넸다.
  • “천천히 살펴보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 결정하면 바로 시술을 진행하자.”
  • 하은은 한참 동안 자료집을 살펴본 끝에 외모도 뛰어나고 경력도 화려한 외과 의사를 기증자로 선택했다.
  • 모든 준비가 끝나자 채아는 시술을 준비하러 자리를 비웠다.
  • 그런데 밀봉된 시험관을 들고 돌아온 채아의 표정이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 시술이 끝난 뒤, 채아는 차가워진 하은의 손끝을 감싸 쥐며 부드럽게 말했다.
  • “정자 주입은 순조롭게 끝났어. 열흘 뒤에 다시 와서 검사받자. 그때면 결과를 알 수 있을 거야.”
  • 하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힘없이 미소 지었다.
  • 하지만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 이미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운명의 톱니바퀴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