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 권예진이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 “오빠, 쟤 좀 봐!”
- 그제야 신문을 내려놓은 권태영이 얼음 칼 같은 시선을 서아라에게 꽂았다.
- “사과해.”
- 서아라는 젖은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 “내가 왜?”
- “사과하라고.”
- 그가 벌떡 일어섰다. 거구의 체구가 확 눌러오듯 위압감을 흩뿌렸다. 하지만 서아라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 “안 하면 어쩔 건데?”
- 권태영이 한 걸음씩 다가왔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날 선 위협이 묻어 있었다.
- “서아라, 나를 몰아붙이지 마.”
- 서아라는 눈시울이 화끈거렸지만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 “그래, 사과할게.”
- 그녀는 권예진을 향해 돌아서며 입가에 가식적인 미소를 걸었다.
- “미안해요, 예진 씨. 오렌지 주스 끼얹은 건 제가 잘못했어요.”
- 그리고 살짝 다가가 오직 그녀에게만 들릴 만큼 낮게 속삭였다.
- “다음엔 뜨거운 아메리카노로 할까 고민 중이에요.”
- 권예진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고, 곁에 서 있던 최순애의 표정은 물 한 방울 튀지 않을 듯 싸늘하게 굳었다.
- 그때 권태영이 서아라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비명이 터져 나올 만큼 강한 악력이었다.
- “나와.”
- 그는 서아라를 복도 끝 테라스로 끌고 가더니 자신의 몸과 난간 사이에 가둬 버렸다.
- “도대체 뭘 바라는 거야?”
- “빚 받는 중이지.”
- 서아라는 그의 시린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 “네가 그랬잖아. 권씨 가문에서 얌전히 있으라며. 근데 난 원래 얌전하게는 못 살거든. 어쩌실래요, 권태영 씨?”
- 권태영이 서아라를 꿰뚫어 보듯 노려봤다. 일렁이는 눈동자 아래로 먹구름 같은 감정이 몰려왔다. 순간, 정말로 그가 손을 뻗을 것만 같아 숨이 멎을 뻔했다.
- 하지만 결국 그는 서아라의 손목을 놓고 한 발 물러섰다.
- ”예진이한테서 떨어져 살아. 그 애는 너랑 달라.”
- 그 말은 독 묻은 바늘처럼 서아라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
- “당연히 다르지.”
- 서아라는 씁쓸하게 웃음을 흘렸다.
- “그 애는 권씨 가문의 금지옥엽 재벌 집 딸이잖아. 그럼 난? 난 대체 너한테 뭐야, 권태영?”
- 권태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흐른 침묵 끝에 서아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 “하긴... 난 네 채권자지.”
- 서아라는 그 침묵을 뚫고 스스로 답을 내뱉었다.
- “명심해, 네가 나한테 진 빚은 고작 100억으로 끝나지 않으니까.”
- 할 말을 다한 서아라는 등을 곧게 세운 채 미련 없이 돌아섰다.
- 깊은 밤, 서아라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 문을 열자 그곳엔 권태영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정갈하게 포장된 새 옷 한 벌이 들려 있었다.
- “뭐야?”
- 서아라가 가시 돋친 목소리로 묻자 그는 아무 말 없이 옷을 내밀더니 불쑥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 차갑고 축축한 소독 티슈가 낮에 우유가 쏟아졌던 아라의 손등에 닿았다. 권태영은 마치 정교한 작업이라도 하듯 그녀의 손을 꾹 눌러 닦아냈다. 손길은 결코 다정하지 않았지만 이상하리만큼 집요하게 집중하고 있었다.
- 서아라는 그가 내려깐 짙은 눈썹과 서늘한 눈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이 낡은 월세방에서 함께 살던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 뜨거운 기름이 튀어 화상을 입었을 때도 그는 그랬다. 인상을 찌푸리며 서아라가 바보 같다고 투덜대면서도, 손만큼은 누구보다 조심스럽게 약을 발라 주던 그 모습이...
- “아파?”
- 그때 그는 퉁명스럽게 물었지만 흔들리는 눈빛에는 걱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 “연준이가 후 불어주면 안 아플 것 같은데.”
- 서아라는 일부러 그때의 기억을 들춰내며 그를 골리듯 말했다.
- 권태영은 멈칫하더니, 정말로 고개를 숙여 서아라의 상처 위로 살살 바람을 불어 주었다. 그 서늘하면서도 다정한 감각에 서아라의 눈가가 다시금 뜨거워졌다.
- “왜 이렇게 된 거야?”
- 서아라의 목소리에는 숨기려 해도 감출 수 없는 떨림이 배어 있었다.
- “우리 왜 이렇게 변해버린 거야?”
- 권태영의 손이 찰나의 순간 멈추었지만 끝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손등을 다 닦아낸 그는 서아라의 손을 확 놓아버렸다. 그리고 가져온 옷을 그녀의 품에 툭 밀어 넣고는 그대로 돌아서 걸어갔다.
- “권태영.”
- 서아라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불러 세웠다.
- “내가 정말 그렇게 싫으면 왜 굳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어?”
- 권태영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 “네가 날 구했으니까.”
- 텅 빈 복도에 그의 낮은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 “권씨 가문은 남에게 은혜를 입고는 못 사는 법이거든.”
- 권태영은 그 말만을 남긴 채 미련 없이 복도 끝으로 걸어 나갔다.
- ‘정말 빚지는 게 싫어서일 뿐일까?’
- 서아라는 속으로 되물었다. 하지만 권태영은 알지 못할 것이다. 어떤 마음은 한 번 빚지면 평생을 다해도 도저히 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 서아라는 문을 닫고 품에 안긴 옷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주머니 속, 권태영이 기억을 잃었을 때 사탕지로 접어 주었던 구겨진 토끼 하나를 가만히 더듬었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처럼, 시린 찬바람이 속절없이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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