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주운 남자가, 재벌이라니?
Astraea
Last update: 1970-01-01
제1화
- 회사에서 서아라의 별명은 ‘의욕 제로 똥구리’였다. 상사의 눈치와 과중한 업무에 치여 영혼까지 탈탈 털린 채 퇴근하던 어느 날, 그녀는 골목 깊숙한 곳에서 비릿한 피 냄새와 마주했다.
- 그곳엔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갈가리 찢긴 고가의 수트 사이로 검붉은 피가 번져 나가고 있었다. 모른 척 지나쳤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아라의 손은 이미 119를 누르고 있었다.
- 그렇게 그녀의 집으로 흘러 들어온 남자에게, 서아라는 연준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 기억을 잃었다는 그는 덩치 만큼이나 힘도 셌고, 무엇보다 일머리가 기가 막혔다. 다만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서아라를 볼 때마다 ‘왜 저렇게 한심하게 살아?’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 서아라는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은 채 그를 달랬다.
- “연준아, 나 이번 달 보너스 받으면 1인당 6만 원짜리 호텔 뷔페 꼭 데려가 줄게!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 그는 그 허무맹랑한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날 이후 연준은 불평 한마디 없이 서아라의 잡일을 도맡기 시작했다.
- 집안일은 기본이었다. 대체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해박한 금융 지식으로 얽히고설킨 서아라의 악성 채무까지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 심지어 그녀의 쥐꼬리만 한 적금을 서너 배로 불려 놓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 그렇게 평화롭던 어느 날이었다. 낡은 월세 건물 앞에 칼 같은 라인의 검은 마이바흐 행렬이 멈춰 섰다. 맞춤 수트를 빼입은 사내들이 차에서 내려 연준에게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 “대표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 서아라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녀가 주워 온 이 살림 만렙, 재테크 고수의 정체... 그는 바로 남쪽 도심의 경제권을 쥐고 흔드는 권씨 그룹의 수장, 권태영이었다.
- 기억을 되찾은 그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이바흐에 오르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아라는 깨달았다.
- 지난 석 달 동안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지낸 시간은... 어쩌면 자신 혼자 꾸었던 허망한 환상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 ...
- “데려가.”
- 그의 목소리에는 한 점의 기복도 없었다.
- “권씨 가문은 빚을 지고는 못 살거든.”
- 서아라는 수행원들에 의해 반강제로 차에 ‘모셔지듯’ 끌려갔다. 그리고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에게 이미 가문에서 정해둔 정략결혼 상대가 있다는 사실을.
- 수많은 수행원에게 둘러싸인 채 차에 오르기 직전, 권태영은 아주 짧은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 그 눈빛은 이상할 만큼 복잡하고 서늘해서 서아라는 그 의미를 헤아릴 틈조차 없었다.
- 수행비서로 보이는 사내가 공손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 “서아라 씨, 저희 대표님의 지시입니다. 함께 본가로 가시죠.”
- 서아라는 눈을 껌뻑이며 충격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 “그럼 저 사람이 약속한 내 100억은요?”
- 내려간 차창 너머로 권태영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 “타.”
- 차가 매끄럽게 출발했다. 권태영은 서아라의 옆자리에 앉아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 “야.”
- 서아라는 발끝으로 그의 구두를 살짝 건드렸다.
- “채권자를 이런 식으로 불법 감금하면 가중처벌인 거 알지? 이제 너, 나한테 100억에 2000만 원 더 빚진 거야.”
- 권태영은 눈꺼풀조차 들지 않은 채 쇳소리처럼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 “조용히 해.”
- “싫거든!”
- 서아라는 지지 않고 말을 쏘아붙였다.
- “이름이 권태영이라고 했지? 너 진짜 잘난 줄 아나 본데, 기억 돌아오자마자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모른 척하기야? 그 좁아터진 월셋방에서 누가 약 갈아주고, 누가 마지막 남은 라면까지 너한테 양보했는데? 누가...”
-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권태영이 번개처럼 눈을 번쩍 뜨더니 서아라의 손목을 확 움켜잡았다.
- 무시무시한 악력에 숨이 턱 막혀 서아라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 “서아라.”
- 그는 그녀 쪽으로 몸을 성큼 들이밀었다. 칠흑처럼 깊은 눈동자가 서아라를 옭아맸다.
- “경고했지. 지난 석 달 얘기, 입 밖으로 다시 꺼내지 마.”
- 서아라는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봤다.
- “왜 못 꺼내? 기억 잃었을 땐 말 엄청 잘 들었잖아. 나보고 아라 누나라고 부르면서 애교도 부리고, 컴퓨터 고장 나면 뚝딱 고쳐주고, 밤새 같이 서류 정리해 주면서 종이로 토끼까지 접어주더니... 지금은 왜 이래?”
- “입 다물어!”
- 권태영이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 흔들리던 눈동자 속에서 격정적인 감정이 치솟았다가, 이내 차가운 수면 아래로 가라앉듯 사라졌다.
- “그런 쓸데없는 기억 따위, 당장 잊어.”
- 서아라는 집게처럼 손목을 옥죄는 그의 손을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다. 결국 홧김에 그의 엄지와 검지 사이 살점을 확 물어버렸다.
- “윽!”
- 권태영이 고통에 손을 놓았다. 매끄러운 손등 위에는 서아라의 선명한 치아 자국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 “너 지금...!”
- 권태영의 눈에 순식간에 불이 번쩍 붙었다. 하지만 서아라는 지지 않고 뻔뻔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 “연체 이자 좀 받은 거야. 불만 있어?”
- 앞좌석에 앉아 백미러로 상황을 살피던 수행비서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 “대표님, 갓길에 잠시 차를 세울까요?”
- 권태영은 서아라를 몇 초간 뚫어질 듯 노려보다가 이내 싸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아니. 저런 수준 떨어지는 애랑 다투고 있으면 내 급만 낮아지지.”
- 그는 다시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더니 서아라를 완전히 투명 인간 취급했다.
- 급 떨어진다... 그가 서아라를 노골적으로 비하하는 말을 내뱉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슴 한구석이 바늘로 콕콕 찔린 듯 아릿하고 시려 왔다.
- 월셋방에 있을 때,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처지였음에도 단 한 번도 서아라에게 이런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 서아라는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억지로 눌러 삼키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쏜살같이 뒤로 밀려나는 화려한 번화가의 불빛만이 눈에 들어왔다.
- 도심 언덕 중턱에 자리 잡은 권씨 가문의 저택은 집이라기보다 하나의 영지에 가까웠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압도적인 분위기에 서아라는 자신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렸다.
- 입구에는 메이드들이 두 줄로 늘어서 있었고, 그 맨 앞에는 기품 넘치는 중년 여인 최순애가 서 있었다.
- “태영아.”
- 그녀가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시선을 곧장 서아라에게 옮겼다. 인자한 미소 뒤에 숨겨진 눈빛에는 상대를 가늠하는 서늘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 “함께 온 이 아가씨는 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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