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 권태영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 “서아라 씨입니다. 제 생명의 은인이죠.”
- 최순애는 서아라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노골적으로 훑어보았다. 잠시 후 그녀의 미간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 “아? 그... 너를 거둬줬다는 아라 씨 말이야?”
- 서아라는 등을 꼿꼿이 펴고 기죽지 않으려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 “여사님, 안녕하세요! 태영 씨 말이 맞아요. 전 그의 생명의 은인이자 채권자거든요. 저 사람, 저한테 100억이나 빚졌어요.”
- 순간, 공간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곁을 지키던 메이드들은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어깨를 미세하게 떨 뿐이었다.
- 우아하게 관리된 최순애의 얼굴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 “100억? 태영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 권태영이 서아라의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뿌리치지 못하도록 단단하고 강한 압박이었다.
- “어머니, 이 사람 말은 다 허튼소리예요. 일단 방부터 배정할게요.”
- “뭐가 허튼소리라는 거야?”
- 서아라가 권태영의 손을 뿌리치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서아라가 최순애를 향해 소리쳤다.
- “이체 기록이 다 증거라고요! 여사님, 직접 판단해 주세요!”
- 최순애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은 채 눈살을 찌푸렸다.
- “권태영, 넌 네 사람 하나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는 거니?”
- 단속... 서늘한 그 단어가 서아라의 가슴을 찔렀다.
- 권태영은 대꾸 없이 반쯤 끌다시피 서아라를 호화로운 저택 안으로 몰아넣었다. 서아라가 배정받은 곳은 3층의 게스트룸이었다.
- 권태영의 안방과는 복도 끝에서 끝, 한참을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 “와... 욕실이 내가 살던 월세집 거실보다 더 크잖아.”
- 서아라는 입을 벌린 채 화려한 욕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매끄러운 대리석 상판을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 그때 권태영이 문가에 서서 차갑게 말했다.
- “앞으로 넌 여기서 지내. 내 허락 없이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 특히 서윙에는 절대 발 들이지 말고.”
- “왜? 네 대단한 비밀이라도 들킬까 봐?”
- 서아라는 비스듬히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러자 권태영의 눈빛이 스르르 가라앉았다.
- “서아라, 선 넘지 마.”
- “그럼 돈부터 갚든가!”
- 서아라는 권태영의 앞으로 성큼 다가가 고개를 치켜들고 그를 올려다봤다.
- “돈만 들어오면 난 바로 사라질 거야. 1초도 안 버티고 나갈 거니까.”
- 권태영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가 비칠 만큼 가까워졌다.
- 좁은 월세방에서 매일같이 맡았던 권태영의 익숙한 체취가 훅 끼쳐 왔다. 다만 지금은 그 향기 위에 서늘한 삼나무 향이 덧입혀져 있었다.
- 찰나의 순간, 권태영의 눈동자에 미세한 흔들림이 스친 것 같았다. 착각이라 여겨질 만큼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 “돈, 줄 거야.”
- 권태영은 한 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 “단, 조건이 있어. 너는 권씨 가문에 얌전히 붙어 있어. 괜히 사고 쳐서 내 눈 밖에 나지 말고.”
- 그 말에 서아라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 “마치 내가 너네 집에 빌붙으려고 안달 난 사람처럼 말하네. 권태영, 날 억지로 여기 끌고 온 건 너야. 기억 안 나?”
- 권태영이 잠시 침묵하다가 차가운 음성을 내뱉었다.
- “네가 월세방에서 석 달 동안 날 돌본 공은 보상할게 하지만 그 외엔 어떤 헛된 기대도 하지 마.”
- “헛된 기대?”
- 서아라는 그 말을 나직이 되뇌었다. 가슴 한구석이 꽉 비틀리는 기분이었다.
- “내가 너한테서 대체 뭘 노린다고 생각하는 건데?”
- 권태영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앞에 서아라는 갑자기 온몸의 기운이 쫙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 “좋아, 알겠어. 100억원 빨리 준비해 줘. 돈 받자마자 바로 꺼져 줄 테니까.”
- 서아라는 미련 없이 욕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 “나 지금 씻을 거야. 나가.”
- 하지만 권태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서아라는 다시 돌아서서 도발적인 시선으로 그를 쏘아붙였다.
- “왜, 권태영? 채권자 샤워하는 거 참관이라도 하고 싶어? 미안한데 그 서비스는 100억 원에 포함 안 됐거든. 추가 요금 내야 해.”
- 권태영의 미간은 찌푸리더니 이내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 서아라는 차가운 문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가슴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 사실 그녀는 그저 평범한 직장인뿐이었다. 어릴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라며 남의 눈치를 살피는 데는 이미 도가 텄다. 그런데도 권태영의 냉담함은 유난히 날카롭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 다음 날 아침 식사 자리, 권태영의 여동생 권예진이 ‘실수’를 가장해 서아라의 우유 컵을 엎질렀다.
- “어머, 진짜 미안해요.”
- 영혼이라고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말투였다.
- “아라 씨가 이렇게 덜렁댈 줄은 몰랐네요.”
- 차가운 우유가 서아라의 온몸을 적셨다. 하얀 원피스는 순식간에 속이 비칠 정도로 흠뻑 젖어 버렸고, 꼴은 말이 아니게 변했다.
- 서아라는 식탁 아래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권태영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남의 일이라는 듯 경제지만 넘길 뿐이었다.
- “괜찮아요.”
- 서아라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미소를 걸었다.
- “예진 씨는 모르셨겠죠. 저희 같은 보통 직장인들 사이에선 덜렁대는 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거든요.”
- 권예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변했다.
- “그게 무슨 뜻이에요?”
- “무슨 뜻이냐면...”
- 서아라는 옆에 놓여 있던 오렌지 주스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권예진이 공들여 차려입은 수트 위로 주저 없이 끼얹어 버렸다.
- “이게 바로 진짜 ‘일부러’라는 거겠죠.”
- 그 순간 식당 안의 공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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