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태어나는 날 죽는 날을 선고 받는다. 나를 지켜보는 나의 모든 순간들이 헛 되지 않게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님 나와 함께 했던 사람들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덜 이라는 단어로 대체 하고 싶었던거였을까? 난 잘 모르겠다. 내가 태어난 순간 1994년 5월 17일 2021년 9월 28일 지금 난 28살이다. 그리고 내가 선고 받은 날 2021년 9월 30일 남은시간은 48시간 난 왜 다른 이들 보다 죽음이 빨라야 했던 걸까? 하늘에서의 나의 자리가 허전했다고 느껴진 건가 싶어 난 가만히 있지 못했다.
“야 너가 죽는다고 생각해봐”
나는 전화 넘어 친구의 말에 소리쳤다. 죽는 날이 아직 많이 남아 자기는 50살에 죽는 다는 친구는 내게 말했다.
“그래 한영아, 가서 편히 쉬어라”
땀이 흐르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신체 건장한 남자가 죽는 이유가 뭐였으면 할까? 싶어 이럴 시간도 없을 것 같아 나는 책상에 앉아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살았던 28년 인생은 완벽하진 못했어도 돌아보니 웃던 날이 많아 참 감사 했다고 꽤 근사한 예기들로 채우기도 아까워 그저 솔직을 담아 진심을 퍼낸 순간들을 하나씩 써내려갔고 엄마 아부지 10년지기 친구 하다못해 동네 단골 슈퍼가게 사장님 마저도 이름모를 지나간 이들도 떠올리다 눈물 흘렸다.
“엄마, 하나뿐인 아들 먼저 가서 미안해요. 아마 나는 하늘에서 꼭 필요한 존재 였을지도 모르나봐 매일 일 핑계대며 제대로 먹지 못했던 아침 진짜 맛있었는데……”
“아버지 말수가 적어 멀게만 느껴져 많이 섞지 못했던 질문들 담배 피지 말라 지키지 못한 약속들 휼륭한 아들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준수야 시간 야속하지? 난 이 시간이 이렇게 빨리 올줄 몰랐는데 그래도 술 마실 때 내 술잔은 남겨둬 내가 비 오는 날이라도 내려 갈 테니 안주는 우리가 항상 먹던 걸로 예기도 사소한 여자 옛날 예기로 내가 너의 친구였던 날이 후회가 없어 참 다행이야 고맙다 짜식 형님 없어도 장가는 가야지~”
나는 다시는 하지 못할 오글 거리는 말들 까지 거리낌 없이 하기 시작했다.
“엄마 사랑해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내가 죽는 날이 46 시간 남았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았을까 후회 다 못해 잘 살았다 위로하다 다시 웃어도 모자른 시간 나는 내가 잘난 사람이라고 한번도 생각 하지 못할 만큼 자존감 없을 사람 이였는데 다시 상에 앉았다.
내가 만들려한 유서가 아닌 밥상에는 잡체 갈비찜 소고기 무국 내가 좋아했던 호박전 다 먹지 못할 것을 아는 아버지도 아무말 하지 않으셨다.
마지막에 김치를 놓으실 때 엄마의 눈에 담긴 눈물은 뭐였을까? 아들을 다시보지 못한다는 사실의 미련 이였을까 아님 다시금 남을 사랑에 애착 이였을까 나는 밥 한 숟가락에 먹지 못할 음식들을 담아옴겨 삼켰다.
밥상앞에 정적이 흘렀다. 나의 한마디가 소중한 날이 오늘보다 더 있을까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엄마께 말했다.
“엄마 아들 얼굴 좀 봐요 많이 봐둬야 우리 아들이 가서도 이렇게 잘생겼었구나 하지”
난 그때 아버지가 우는 걸 처음 봤다. 그리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묵직하지도 않았다. 그저 나도 울줄 아는 사람인데 울지 못해 억울하것 같아 그 표정을 난 설명조차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떨린 손을 나에게 옮겨담아 나의 마디를 붙잡고 말씀하셨다.
“아들….아…아버지가 곧 따라갈게”
먹지못한 밥상에 엄마의 울음이 전달 되었다. 엄마는 다시금 만지지 못할 나의 머리를 쓰담었다.
“아이고 언제 이렇게 컸을 꼬……내 새끼 엄마가 많이 해주지 못해 미안해”
나의 긴 시간이 새벽으로 바뀌어도 난 잠을 못 이뤘다.
20살의 나는 누구보다 무모하고 과감했으며 (한 소년이 주방에서 행주를 집어던지며)
“ 아 사장님 이럴거면 저 그만 두겠습니다. ”
23살에 나는 현실을 직시하는 평범한 인턴 이였으며
“네 LCK 저희 본부에서는 고객님 그런 품목을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26에 나는 (휴게실)
“저 사직 아니 아니 건강 상으로 잠시….. 아 네 팀장님~”
어쩌면 많이 용감하지 못해 시간을 더써 망설였다.
그리고 28 7월 나는
" 우리 헤어지자 "
너무 나도 많은 말을 하고 싶었던 사랑에게 많은 말을 꾹 눌러 담아 삼켜 한마디 말로 해버렸다. 그녀의 웃음이 순수해서 내가 그녀를 울리기에는 너무나도 나쁜 사람이라 놓아줘도 날 많이 기억해 주지 않았으면 했다.
날짜가 지났다. 2021년 9월 29일 들고 가지도 못할 짐들을 나누어 주어도 못전한 말들 마음들이 너무나도 많아 내가 범접 할수 없었다. 엄마는 내가 좋아했던 얼큰 수제비국도 밤새 끓려 내게 건냈다.
이게 다 무슨 소용 일까? 싶어 밥 숟가락도 뜨다 못해 눈물을 흘렸다. 울기는 어제 다 운 것 같은데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차마 모색 할수 없었다.
“엄마 나 내일 죽어 내일 죽는다고 나한테 이러지마요 나 그냥 그냥”
난 엄마가 해준 밥상이 먹고싶어 가서도 꿈으로 엄마를 괴롭힐까봐 소리쳤던 것일까? 아님 엄마가 앞에 있어도 보고 싶었던 걸까? 차마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아버지도 오늘은 출근을 하지 않으셨나보다. 날 마주하고 앉아 말씀 하셨다.
“후회 되는 게 있음 지금 하거라”
질문도 아닌 것에 뭔 대답이 이렇게 많았던건지 딱하나 고르지도 못할 거면서 골라도 되돌리지 못할 것들 이면서 뭘 그리 정적 했는지 없을 것입니다 없습니다 아니 있지도 못할 것입니다 또 아니 있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때
“누가 가는 건 중요하지 않지 내가 찾아 갈게요”
난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을까? 나는 이미 그녀의 집 앞으로 가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만나 평한 이별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뻔한 일들이다. 내가 널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에 새로운 일로 벗어나 있었고 난 너에게 뭐였을까 싶어 생각 들때도 난 너의 손을 놓지않았다. 지금 우리가 헤어지기에는 그 보다 더 좋았던 날들이 많았으니까 조금이라도, 더 조금이라도 너가 날 떠올릴 수만 있다면 그것이 나에 대한 원망이 아니길……
나는 서울 어느 빌라 4층에 멈춰 숨을 헐덕였다.
“하…하…..”
그녀가 때마침 급히 현관문을 열어 나왔고 나는 달려가 안겼다. 눈치 채지 못한 그녀가 놀라며 말하며 돌아봤다.
“지금 뭐하시는……오빠…….”
“미안해 내가 많이 늦었지….”
그녀는 내게 안겨 나를 쳐 내기 시작했다.
“나쁜놈 나쁜 놈 나한테 어떻게 그래 오빠가 다른사람도 아닌 오빠가….나…나한테….”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다시 만난 너와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이 없을것같아 끝까지 망설였다. 결국 나의 선택의 후회는 내가 널 평생 그리워 하겠구나 느낀 그런 후회 밖에 없을 거라는 걸 나는 확신했다.
우린 입을 천천히 맞추고 집안으로 쓸려 들어갔다. 현관문이 닫치고 난 천천히 윗옷을 벗기 시작했다. 날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살살이한 조개처럼 반짝이다 흔들 거렸다.
난 다시입을 맞췄고 어린 기집애가 나의 손길을 기다리듯 팔을 올렸다. 나는 그녀의 옷을 벗기고 고개 목깃 한켠에 손을 옮겨 침을 삼켰다. 입은 멈출 줄 몰랐고 나는 그녀를 들어안겨 침대로 향했다.
우리가 설령 결혼이라는 형식 적인 약속을 못한다 남들 다 해보는거 따라해보기로 한 것들까지 함께 하지 못한다하더라도 오늘 만은 꼭 가지마라
이 시간 만큼은 지나지마라 다시 내가 너에게 달려 갈수 있는 기회를 내가 하늘에 빌어 걸어 보겠다고 약속한 그날 우리의 시간은 누구보다 애틋했다.
나는 그녀와 나란히 누워 바람부는 커튼 사이에 조금 뜨거울지 모를 햋빛 등위로 그녀의 머리칼을 넘겨주며 말했다.
“고마워”
우리 그림은 그 어떠한 걸로도 표현 할수 없었다. 너와 내가 맞추어 나갔던 발폭 그 미간들이 새겨져 있는 너의 집이 우리 집이 될 때도 익숙함에 어차피 이별 할거란 생각을 해버렸다. 넌 어쩌면 어느 순간부터 내게 귀찮아졌다.
그렇다고 다른 이를 사랑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나의 일상이 조금 바빠졌을 뿐인데 난 뭐가 그리 피곤하다고 데이트 하자는 너와의 약속을 그렇게 미뤘을까? 진정 쉬어도 다른 할 일을 안 하는 건 전혀 아닌데 잘 쉬었다고 느낀적도 한번도 없는데 익숙함을 꿈꿨던 나는 그 익숙함이 주는 무서움을 몰랐던 걸까?
충분히 그러하지도 않은 것에 예민해지고 변했다는 너의 말에 이해 보다 변명을 하기 바빴다. 진심이 아닌 그냥 이순간을 피하고 싶어 나오는 미안해 라는 말이 많아져 갔고 우린 조금 씩 우리가 맞추었던 발폭을 자기만의 방식으로상대방의 동의 없이 바꾸어 나갔던 것이다.
그럼에도 우린 다시 옛처럼 식탁에 앉았고 내가 바뀐건 눈길이 내 휴대폰이 아닌 너의 눈에 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한번 깨닫고 나면 그 깨달음을 잊지 못해 똑 같은 짓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나는 내가 했던 모진 말들을 주워 담으려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