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 [예슬 시점]
-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한발 늦은 후였다.
- "쩌어억——!"
- 예리한 칼날이 캔버스를 찢고 지나가는 파열음에, 내 심장마저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
- 순간 눈앞이 아찔하게 비워지며 숨통이 턱, 멎어버렸다.
- 1미터가 훌쩍 넘는 캔버스는 위에서 아래로 처참하게 두 동강이 나 있었다.
- 그림 속 서늘할 만큼 아름다웠던 내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져 비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 장장 1년 가까이 쏟아부은 내 피와 땀이, 순식간에 쓰레기장 구석의 헌 헝겊 쪼가리로 전락해버렸다.
-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두 눈에 시뻘건 살기를 띤 채 그녀를 뚫어질 듯 쏘아보았다.
- 백혜주는 도리어 실실 쪼개고 있었다.
- 그녀는 가증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더니, 쥐고 있던 커터 칼을 책상 위로 툭 던졌다.
- "어머, 미안. 발이 살짝 미끄러졌네."
- 발끝에서부터 정수리까지 펄펄 끓는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나는 달려들어 그녀의 머리채를 확 휘어잡고는, 책상 위의 커터 칼을 집어 들고 그녀의 뺨에 서늘하게 가져다 댔다.
- "나도 미안."
- 나는 이를 빠득빠득 갈며 속삭였다.
- "나도 방금 손이 미끄러질 뻔했네."
- "너 미쳤어?!"
- 사색이 된 혜주가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 "사람 살려——!"
- 비명을 듣고 작업실로 뛰어 들어온 강세혁은, 내가 혜주의 목덜미에 칼을 들이밀고 있는 꼴을 보곤 경악으로 두 눈을 부릅떴다.
- "백예슬, 당장 그 칼 안 내려놔?!"
- 남자가 내 손목을 무자비하게 낚아챘다. 뼈가 산산조각 날 것만 같은 끔찍한 악력이었다.
- "이거 놔! 저 년이 내 그림을 어떻게 만들어 놨는지 안 보여?!"
- 하지만 그는 내 손가락을 억지로 하나하나 꺾어내더니, 커터 칼을 앗아 문밖으로 멀리 내던져 버렸다.
- "너 진짜 돌았어?! 혜주는 네 동생이야!"
- 나는 사력을 다해 발악했지만, 그의 우악스러운 힘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 손목이 떨어져 나갈 듯 아파왔다. 평생 붓을 쥐어야 할 내 소중한 손이, 그에게 이토록 처참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 가슴 밑바닥에 실낱같이 남아있던 마지막 미련마저 그의 손에 의해 잔인하게 숨통이 끊어졌다.
- 그제야 처절하게 깨달았다. 이 남자가 제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단 한 사람은, 오직 백혜주뿐이라는 사실을.
- 백혜주는 가녀린 종이 인형처럼 남자의 품으로 쓰러지며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 "흐윽,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언니 심기를 거슬러서..."
- 그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 "괜찮아, 안심해. 내가 있는 한 저 애가 털끝 하나 못 건드리게 할 테니까."
- 그 역겨운 광경은 날이 닳고 부러진 무딘 칼날이 되어, 내 온몸의 살점을 1인치씩 포 뜨듯 잔혹하게 난도질해 댔다.
- 나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남자를 향해 절규했다.
- "저 년이 내 그림을 박살 냈다고! 두 눈 달렸으면 똑바로 봐!"
- 강세혁은 망가진 캔버스를 무미건조한 눈으로 쓱 훑었다.
- "고작 그림 하나일 뿐이잖아.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망가졌으면 걍 내다 버려."
- "내다 버리라고? 내 1년 치 피와 땀이 담긴 전부라고! 네가 뭔데 저 년을 감싸고 도는 건데?!"
-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빈 액자 틀을 집어 들고 혜주의 머리를 향해 가차 없이 내리찍었다.
- "미친년아, 네가 한 짓에 대한 대가를 치러!"
- 퍼억! 액자가 혜주의 머리와 뺨을 무자비하게 강타했고, 그녀는 기겁하며 비명을 지르고는 강세혁의 등 뒤로 파고들었다.
- 벼락같이 내 팔목을 꺾어 제압한 세혁이 나를 화실 밖으로 거칠게 내동댕이쳤다. 그의 얼굴에는 짙은 살기와 분노가 서릿발처럼 서려 있었다.
- "내가 그동안 너무 오냐오냐 풀어줬지. 이딴 식으로 미쳐 날뛸 줄 알았으면 진작에 목줄을 채워두는 건데."
- 그는 나를 꼭대기 층의 후미진 다락방으로 질질 끌고 가 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그러고는 턱을 으스러져라 틀어쥐고 무자비하게 입술을 탐해왔다.
- 경고의 의미를 노골적으로 담은, 얼음장같이 서늘하고 폭력적인 입맞춤이었다.
- "여기 처박혀서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똑바로 반성해. 네 주제를 파악하기 전까진 이 방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갈 줄 알아."
- 공포와 분노가 뒤엉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나는 나를 짓누르는 남자의 입술을 피가 나도록 꽉 깨물어 버렸다.
- 강세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터진 입술의 핏방울을 엄지손가락으로 훔쳐냈다. 그의 눈동자에 폭주 직전의 진득한 분노가 일렁였다.
- "대가리나 식혀."
- 쾅! 굉음과 함께 굳게 닫힌 철문 너머로, 자물쇠가 육중하게 걸려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 나는 요동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사력을 다해 이성을 붙잡았다.
- 밀라노행 비행기는 내일 오후. 어떻게든 이 지옥을 빠져나갈 시간은 아직 충분했다.
- --
- 점심시간, 철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혜주가 식판을 든 채 뱀 같은 미소를 흘리며 들어왔다.
- "세혁 오빠가 널 이 좁아터진 곳에 가둬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지?"
-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탁자 위에 식판을 내려놓았다.
- "언니. 내 남자한테 알짱거리면 어떻게 되는지 이제 뼈저리게 느꼈어?"
- 나는 그 개소리를 가볍게 무시한 채, 그녀의 등 뒤로 반쯤 열려 있는 문틈만을 예의주시했다.
- "그거 알아? 나 아예 이 집에 들어와서 살기로 했어. 그것도 언니가 쓰던 안방에서…" 그녀가 나를 향해 끈적하고 도발적인 시선을 던졌다.
- "우리 세혁 오빠, 진짜 끝내주더라. 침대 위에서 어찌나 몸을 불사르던지, 아까는 나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다니까?"
- 주먹을 꽉 쥔 손톱이 살점 속으로 파고들었다. 잠잠해졌던 활화산이 다시금 용암을 토해내듯 지독한 살의가 솟구쳤다.
- 어차피 떠날 마당에 강세혁이 저 년과 안방에서 나뒹굴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었지만, 내 구역에서 나를 이토록 천박하게 능멸하는 꼴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 나는 침대에서 뛰쳐나가, 방심하고 있던 혜주의 머리채를 사정없이 틀어쥐었다. 그리고 묵직한 원목 문짝을 향해 그녀의 대가리를 자비 없이 처박아버렸다.
- "그래서 어쩌라고? 그 잘난 입으로 걸레 같은 소리 지껄이니까 재밌어?"
- 쾅! 쾅! 쾅!
- 두개골이 박살 날 듯한 파열음과 함께, 혜주의 목구멍에서 돼지 멱따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그녀를 쓰레기 버리듯 팽개치고, 틈을 타 계단을 향해 미친 듯이 내달렸다.
- 내가 왜 그 오만한 강세혁의 꼭두각시 노릇을 해야 해? 내가 왜 이 다락방에 얌전히 갇혀 있어야 하냐고!
- 이 구역질 나는 집구석도, 내 인생을 망쳐놓은 저 인간들도 전부 영원히 끝이야!
- 백혜주의 요란한 비명에 놀란 경호원들이 무전기를 켜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 아래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묵직하게 열리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 나는 코웃음을 치며 곧장 비상계단을 타고 한 칸씩 뛰어내리듯 질주했다.
- 계단 모퉁이를 도는 찰나. 콘크리트 벽처럼 단단한 가슴팍에 쾅 하고 처박히며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깨질 듯한 이마를 부여잡고 고개를 든 순간, 뼛속까지 소름 끼치도록 익숙하고도 위험한 수컷의 체취가 훅 끼쳐왔다.
- "도망쳐 봐. 이 다리로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나 보게."
- 지옥에서 올라온 포식자 같은 강세혁이 내 허리를 무자비하게 낚아채더니, 발버둥 치는 나를 짐짝처럼 들쳐업고 다시 다락방으로 질질 끌고 올라갔다.
- 바닥에 널브러진 혜주는 풍선처럼 퉁퉁 부어오른 얼굴을 감싸 쥐고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 "오, 오빠! 저 미친년이 날 죽이려고 했어! 당장 저년 좀 어떻게 해 봐!"
- 하지만 강세혁은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침대 위로 나를 사정없이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 "당장 나가."
- 혜주가 상황 파악을 못한 채 멍청하게 주저앉아 있자,남자가 살벌하게 고개를 비틀며 으르렁거렸다.
- "안 기어나가고 뭐 해. 내가 얘랑 어떻게 붙어먹는지 끝까지 구경이라도 하든가."
- 거대하고 탄탄한 근육질의 몸이 내 위로 무자비하게 짓눌러왔다.
- "조용히 반성하라고 가둬놨더니, 기어이 패악질을 부리며 선을 넘네, 백예슬."
- 그가 내 턱을 움켜쥐고 집어삼킬 듯 입술을 부딪쳐 왔다. 사납게 닫힌 잇새를 비집고 들어온 축축한 열기가 단숨에 내 모든 숨결을 강탈해 버렸다.
- 나는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처절하게 발버둥 쳤지만, 바위처럼 단단한 그의 몸뚱이에 깔려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할 뿐이었다.
- 그 적나라하고 짐승 같은 광경에 경악한 혜주는 두 눈을 치켜뜨더니, 바들바들 떨며 울음보를 터뜨리고는 기겁하여 방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 그의 위험하게 성난 중심이 허벅지 안쪽을 억세게 문질러오자, 아랫배를 타고 짜릿한 전류가 관통하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파드득 떨려왔다.
- 이 남자가 뼈에 사무치도록 밉고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런 폭력적인 손길에도 조건반사처럼 속절없이 젖어 드는 내 몸뚱이가 수천 배는 더 혐오스러웠다.
- 눈물을 뚝뚝 흘리며 끔찍한 그 입맞춤을 고개 저어 피했다.
- "놔… 제발 비켜! 너 진짜 끔찍하게 소름 돋아…"
- 하지만 내 발악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그의 탐욕스러운 입맞춤은 목덜미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더 깊은 곳으로 거침없이 파고들며 억눌린 분노를 가학적으로 쏟아냈다.
- 찢어질 듯한 숨을 내몰아쉬며 끝까지 저항해 보았지만, 이내 온몸의 기력이 진흙처럼 완전히 소진되어 버렸다.
- 나는 두 눈을 꾹 감은 채 모든 저항을 체념했다. 인형처럼 늘어진 몸으로 무의미한 눈물만 흘려보냈고, 그를 향했던 내 심장마저 완벽하게 싸늘히 식어 내렸다.
- 그 순간, 미친 듯이 폭주하던 세혁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 그가 내 귓가에 거칠고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끓어오르는 욕정을 짓눌렀다.
- 그는 내 몸을 구속하던 손을 풀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내려다보는 그의 새카만 눈동자 속에는, 도무지 읽어낼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 "그렇게도 내가 치가 떨리게 싫어? 어?! 이유가 뭔데!"
- 나는 찢어진 옷자락을 쥐어짜듯 끌어당겨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매며, 침대 구석으로 도망쳤다.
- "너 스스로가 제일 잘 알잖아."
- 목이 콱 메어 갈라진 음성이었지만, 그 온도는 서릿발처럼 지독하게 차가웠다.
- 그는 그 자리에 망연자실하게 굳어 있더니, 이내 문이 부서져라 거칠게 닫고 방을 나가버렸다.
- 자존심이 상해 분노했을 것이다.
- 하지만 이제 내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내일 당장, 영원히 이곳을 떠나버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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