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 [백예슬 시점]
- 전화를 끊고 나자, 짓누르던 가슴속의 무거운 돌덩이가 마침내 조금은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 강세혁을 위해서라면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참고 견뎌왔다.
- 3년 전 집으로 들어온 이후, 혜주는 부모님의 부채감을 무기 삼아 내 손에 쥐어진 것들을 끊임없이 빼앗아 갔다.
- 강세혁을 향한 태도 역시 처음의 얄팍한 떠보기에서 점차 노골적인 도발로 변질되며, 내 인내심의 한계를 번번이 시험했다.
- 어느 파티에서였던가. 혜주는 비틀거리며 강세혁의 품에 쓰러지듯 안겼다.
- 단단히 묶여 있어야 할 드레스 어깨끈이 스르르 흘러내렸고, 훤히 드러난 맨가슴의 하얀 살결이 그대로 남자의 몸에 밀착되었다.
- 강세혁은 타인의 시선을 가려주겠다는 듯 즉시 혜주를 품에 꽉 끌어안더니, 제 재킷을 벗어 덮어주기까지 했다.
- 군중 속에 우두커니 선 내 두 눈으로, 아니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내 연인의 시선이 다른 여자의 가슴골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던 것을.
- 그러고는 두 사람이 그대로 부둥켜안은 채, 굳게 닫힌 코트룸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까지도.
- 그들이 다시 밖으로 나온 것은 족히 30분이 지난 후였다.
- 문 앞에 버티고 서 있던 나는, 간신히 목소리의 떨림을 억누르며 물었다.
- "혜주가 일부러 수작 부린 거, 정말 모르는 거야? 방금 둘이서 그 오랜 시간을 함께 있으면서, 내 기분이 어떨지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냐고!"
- 하지만 남자는 나의 처절한 분노를 무미건조하게 넘겨버리며 도리어 나를 타박했다.
- "맨몸이 다 드러날 뻔해서 놀란 애를 달래준 것뿐이잖아. 넌 어쩜 친동생한테까지 그렇게 악의적이야? 혜주가 질투라도 나?"
- 심장을 수만 개의 바늘로 난도질당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켰다.
- 그 일 이후로도, 바에서 술기운을 빌린 혜주가 그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은밀하게 웃음 짓거나, 심지어 대담하게 남자의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어 헤치는 일까지 벌어졌다.
- 눈이 뒤집힌 내가 뛰쳐나가 혜주를 거칠게 떼어내며 제발 얌전히 좀 굴라고 소리쳤을 때, 강세혁은 오히려 내 손목을 억세게 틀어쥐고는 예슬이를 제 등 뒤로 숨겼다.
- "백예슬. 그 실체 없는 구질구질한 질투 좀 거둬."
- "이거 놔! 부모님을 대신해서 따끔하게 혼을 내야겠다고!"
- 발버둥 칠수록 그의 악력은 더욱 강해졌고, 뼈가 부러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 불에 덴 듯 화끈거리는 손목보다, 갈가리 찢겨 나가는 심장의 고통이 수천 배는 더 지독했다.
- 그리고 내 생일날 저녁, 레스토랑에서 혜주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 화면 속 그녀는 오열하며, 세혁이 지금 당장 오지 않으면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다고 난동을 부렸다.
- 나는 제발 나를 혼자 두고 가지 말라고 애원했지만, 그는 냉혹하게 나를 내쳐버렸다.
- "생일이 그렇게 대수야? 넌 네 동생이 죽든 말든 상관없어?"
- 그는 가차 없이 나를 내동댕이친 채 백혜주에게로 달려갔다.
- 화려하게 세팅된 커플 코스 요리 앞에 홀로 남겨진 나는,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 이와 같은 촌극이 밥 먹듯이 반복되었지만, 나는 번번이 눈감고 참아주었다.
- 도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냐고, 무너져 내리며 울부짖은 적도 있었다.
- 하지만 돌아오는 건 너무나도 평온한 대답뿐이었다.
- "혜주는 화재에서 날 구하다 다쳤어. 난 걔한테 평생 갚아도 모자랄 빚이 있다고."
- "백혜주가 아니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 수백 수천 번 진실을 호소했지만, 그는 내 말을 단 한 글자도 믿어주지 않았다. 도리어 혜주의 거짓말을 증명할 명백한 증거를 가져오라며 나를 몰아세웠다.
- 그날의 지독한 대형 화재는 모든 진실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내겐 내 결백을 증명할 그 어떤 수단도 남아있지 않았다.
-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
- 두 사람이 멀어져 간 텅 빈 자리를 바라보며 깨달았다.
- 내가 그토록 아등바등 매달려 온 모든 시간들이 한낱 쓰레기만도 못한 휴지 조각이 되었다는 것을.
- 뺨을 스치는 스산한 밤바람에 구질구질한 미련마저 날려 보내고 정처 없이 밤거리를 걷다 보니, 어느새 본가 대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웅장한 저택을 눈에 담으며, 짓눌렸던 숨을 길게 토해냈다.
- 3일 뒤, 나는 이 지긋지긋한 늪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출 것이다.
- --
- 다음 날, 나는 새로 산 원피스를 입고 그가 처음 선물해 주었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건 채 호숫가 레스토랑을 찾았고, 고요하게 저물어가는 붉은 석양을 눈에 담았다.
- 남몰래 미소 짓던 찬란했던 지난날의 파편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 직원이 테이블에 코스를 세팅하고 나서야, 습관처럼 2인분을 주문해 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씁쓸한 헛웃음을 삼키며 맞은편에 식기가 놓이도록 그저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 막 나이프를 쥐려던 순간, 고막을 긁는 낯익고도 소름 끼치는 음성이 들려왔다.
- "재수 없어. 제일 뷰 좋은 자리를 누가 차지했잖아."
- 서혜주가 강세혁의 팔짱을 꽉 낀 채로 보란 듯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 "어머, 언니? 언니가 여긴 웬일이야?"
- 나는 안광 한 점 없는 서늘한 눈으로 두 사람을 훑어내렸다.
- 강세혁의 서늘한 시선이 내 쇄골에 안착한 펜던트를 스치듯 지나갔고, 그 순간 남자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 혜주는 주변 사람들이 다 들으라는 듯, 작정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높였다.
- "지금 있지도 않은 사람이랑 데이트하는 척하는 거야? 파혼당한 충격이 크다지만 너무 궁상맞은 거 아니야?"
- 백혜주는 숨넘어갈 듯 요란하게 웃어대며 남자의 너른 품으로 쓰러지듯 안겼다.
- "원래 오늘 세혁 오빠랑 언니 결혼 날짜 확정 지을 뻔했는데. 그거 언니가 제 손으로 다 망쳐버린 거 알지?"
- 세혁은 그 얄팍한 도발을 제지하기는커녕, 자연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옆 테이블로 이끌 뿐이었다.
- "신경 쓸 것 없어. 이 자리도 괜찮으니까."
- 무심하게 내뱉는 음성이 날 선 바늘이 되어 내 심장을 촘촘하게 찔러왔다.
- 최소한 겉치레로라도 예의를 갖출 줄 알았건만, 그는 내 앞에서 그런 수고조차 할 의지가 없어 보였다.
- 식사가 시작되자, 강세혁은 다정하고 인내심 넘치는 손길로 생선 가시를 일일이 발라내어 스푼으로 혜주의 입가에 직접 가져다 대었다.
- "먹어 봐. 여기 농어 구이가 꽤 부드럽거든."
- "오빠, 예슬 언니한테도 이렇게 가시 발라준 적 있어?"
- 강세혁은 묵묵부답이었다.
- 당연하지. 그는 단 한 번도 내게 그런 다정함을 베푼 적이 없었으니까.
- 혜주는 얄밉게도 목소리를 한껏 키워 조잘거렸고, 그 가시 돋친 웃음소리가 이명처럼 내 고막을 파고들었다.
- 신경 쓰지 말자고 수십 번을 되뇌었건만, 어느새 손바닥을 파고든 손톱자국에서 핏방울이 배어 나올 만큼 고통스러웠다.
- 식사를 마치고 막 계산을 요청했을 때, 혜주가 레드 와인 두 잔을 들고 다가와 내 옆자리에 불쑥 앉았다.
- 가식적인 미소를 흘리며 백혜주가 속삭였다.
- "언니, 내가 한잔 올릴게. 드디어 세혁 오빠 옆자리, 나한테 양보해 줘서 정말 고마워."
- 나는 한 치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억양으로 받아쳤다.
- "남이 버린 쓰레기 주워 먹는 끔찍한 취향이 있는 줄은 몰랐네. 강세혁? 너나 평생 안고 살아."
- 순식간에 혜주의 안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 "너... 너 방금 뭐라고 했어!"
- "백 번을 말해도 너희 둘이 구제 불능 쓰레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원한다면 녹음해서 평생 귓가에 틀어줄 수도 있는데, 해줄까?"
- 살벌한 분위기에 주변 손님들이 수군거리며 흥미진진한 시선을 던져대기 시작했다.
- 싸구려 구경거리가 되긴 싫어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러나 이성을 잃은 혜주가 내 팔목을 신경질적으로 낚아챘다.
- "어딜 도망가!"
- 홱 손목을 쳐든 순간, 핏빛 와인이 내 가슴팍으로 사정없이 쏟아지며 새하얀 원피스를 처참하게 붉게 물들였다.
- 이번만큼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나는 손을 높이 치켜들어, 있는 힘껏 그녀의 뺨을 갈겨버렸다.
- "짜아아악——!"
- 뺨을 타격하는 파열음과 함께 레스토랑 안이 찬 물을 끼얹은 듯 정적에 휩싸였고, 모든 이목이 우리에게로 쏠렸다.
- 선명한 손자국이 뺨에 부어오르자, 혜주는 현실을 부정하듯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망연자실하게 굳어버렸다.
- "너… 네가 감히 날 쳐?"
- 나의 갑작스러운 반격에 흠칫 놀랐던 강세혁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황급히 혜주를 제 등 뒤로 감싸 안았다.
- "백예슬, 너 미쳤어?!"
- 나는 턱을 치켜들고 한기를 가득 머금은 조소를 흘려보냈다.
- "백혜주, 내가 너랑 그렇게 격식 없이 구는 사이였던가?"
- "이 뺨은 네 스스로 자초한 거야. 그리고 강세혁, 네 눈깔이 삐었다면 차라리 지금 당장 도려내 버려."
- 세혁의 숨이 멎은 듯 굳어졌다. 그가 아는 나는, 감히 그에게 이런 독설을 뱉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 늘 순종적이고 나긋나긋한 미소만을 보여주던 내가, 이렇게 서슬 퍼런 혐오를 드러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나를 뚫어질 듯 쳐다보는 남자의 흔들리는 동공에는 당혹감이 번졌고, 그는 입술만 달싹일 뿐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 나는 우아하고 여유로운 손길로 냅킨을 들어 얼룩진 가슴팍을 툭툭 닦아냈다.
- "오늘 처음 입은 원피스야. 백혜주, 1원 한 푼 빠짐없이 전액 배상해."
- 그러고는 목에 걸려 있던 다이아몬드 펜던트를 거칠게 뜯어내어 강세혁의 가슴팍을 향해 미련 없이 집어 던지고, 당당하고 도도한 발걸음으로 레스토랑을 빠져나왔다.
유료회차
결제 방식을 선택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