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했던 7년, 이젠 안녕
Walda
Last update: 1970-01-01
제1화
- [백예슬 시점]
- 오늘은 원래 강세혁이 우리 집에 와서 부모님과 결혼식 세부 사항을 확정 짓기로 한 날이었다.
- 하지만 와인 셀러의 원목 진열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지고, 수십 병의 와인이 바닥으로 박살 나는 순간 깨달았다. 아, 모든 게 끝났구나.
- 쓰러지는 진열장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버티고 섰는데, 백혜주가 비명을 지르며 내 몸을 바닥으로 밀쳐버렸다.
- 산산조각 난 유리 파편이 피부를 스며들었고, 코를 찌르는 진한 와인 향이 끔찍한 통증과 뒤엉켜 온몸을 덮쳐왔다.
-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번지더니, 기어이 모든 사고 회로가 툭, 끊어져 버렸다.
- 우당탕 소리에 뛰쳐 들어온 아빠는 난장판이 된 바닥을 보며 가슴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 "내, 내가 얼마나 아끼던 와인들인데…!"
- 그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두 눈에는 매서운 분노가 일렁였다.
- "또 네 짓이냐?!"
- 내가 입술을 떼기도 전에, 혜주가 먼저 아빠 품으로 뛰어들어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 "아빠, 언니 원망하지 마세요. 제가 실수로 언니 화나게 해서 그래요..."
- 짝!
- 단단한 손바닥이 내 뺨을 후려쳤다. 얼굴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 "잠깐 눈을 뗀 사이에 동생을 괴롭혀? 이 뻔뻔한 것!"
- 엄마는 다급한 손길로 혜주의 상처부터 살폈다.
- "우리 딸, 많이 놀랐지? 앞으로 쟤랑 절대 단둘이 있지 마. 어휴, 어쩜 저렇게 독해 빠졌어? 제 친동생한테 손찌검이라니."
- 입안에 비릿한 피맛이 감돌았다. 손끝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파르르 떨렸다.
- "저 아니에요!"
- 목이 꽉 메여왔지만, 억울함을 꾹 누르며 악착같이 항변했다.
- "혜주가 일부러 선반을 밀어버린 거라고요. 제게 뒤집어씌우려고요."
- 하지만 두 사람의 시선은 끝내 내게 닿지 않았다.
- "아빠, 엄마. 왜 제 말은 단 한 번도 들어주지 않으세요?"
- 고개를 들자, 문가에 선득한 표정으로 서 있는 강세혁과 시선이 얽혔다.
- "세혁아, 나 정말 손가락 하나 안 댔어..."
- 기어이 차오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 그가 서늘한 보폭으로 다가오자, 거대한 체격이 천장의 조명을 가리며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발바닥을 헤집는 날카로운 통증에 그 자리에 멈춰 서야만 했다.
- 그의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내 턱선을 느릿하게 훑어 내리더니, 이내 거칠게 턱을 쥐어 올렸다.
- "진열장이 무너질 때, 네가 바로 옆에 있었잖아."
- 억양 없는 평탄한 음성이었지만, 그 안에는 시퍼렇게 날 선 칼날이 숨겨져 있었다.
- "혜주한테 손찌검해 놓고 내 앞에선 착한 척이야? 갈수록 연기가 느네."
- 불과 엊그제 밤, 그의 입맞춤은 들불처럼 번져 내 피부 한 점까지 모조리 삼켜버릴 듯 맹렬했다.
- 거친 숨을 내몰아쉬며 내 귓가에 사랑한다고 끊임없이 속삭이던 그였다.
- 불덩이 같은 온기로 나를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아득한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으면서.
- 피부에 닿았던 그 뜨거운 감각이 이토록 생생한데, 우리는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 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세혁을 올려다보았다.
- "저 애가 함정을 판 거라고 말했잖아. 왜 내 말은 안 믿어주는 건데?"
- 짧은 침묵 끝에, 그의 눈빛이 단호하게 굳어졌다.
- "혜주는 내 목숨을 구한 은인이야. 그렇게 착한 애가 거짓말을 할 리 없잖아."
-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나를 지나쳐 미련 없이 혜주에게로 다가갔다.
- "겁먹을 것 없어. 병원부터 가자."
- 그는 혜주의 작은 몸을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 아주 오래전, 나를 안아주었던 그 다정한 온기 그대로.
- 아빠가 쩔쩔매며 비굴한 웃음을 지었다.
- "강 대표, 정말 미안하네. 오늘 결혼식 얘기는..."
- 세혁의 목소리는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 "미루시죠. 지금 예슬이 상태론 결혼을 진행하는 게 무의미해 보이네요."
- 그들은 그를 에워싸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산산조각 난 유리 파편 사이에 덩그러니 남겨진 건 나 혼자뿐이었다.
- 와인 저장고의 스산한 냉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지독한 추위에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 가슴속에 남아있던 마지막 온기마저 서서히, 완벽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 3년 전, 부모님은 혜주를 집으로 데려왔다. 오래전 잃어버렸던 내 친동생이라고 했다.
- 티 없이 맑고 평온했던 내 일상이 산산조각 난 건 바로 그때부터였다.
- 부모님은 뼈저린 죄책감에 시달렸고, 잃어버린 십수 년의 세월을 어떻게든 보상하려 애썼다.
- 혜주는 그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세상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
- 처음엔 나도 기꺼이 양보했지만, 점차 깨닫게 되었다. 저 애는 그저 내 것을 빼앗는 행위 자체를 즐긴다는 사실을.
- 옷부터 장난감, 값비싼 보석, 부모님의 애정, 그리고 종국엔 내 약혼자까지 전부 다.
- 살을 에는 고통을 악물며 박힌 유리 조각들을 억지로 뽑아낸 뒤,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 절뚝이며 처치실로 막 들어선 참이었다.
- 그곳에는 혜주의 생채기나 다름없는 상처를 소독해 주며 곁을 지키는 강세혁이 있었다.
- 혜주는 가엾게 훌쩍이며 사력을 다해 남자의 너른 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 사고 당시 저 애가 서 있던 위치에선 털끝 하나 다칠 일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 간호사들이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보내며 속삭였다.
- "남편분이 정말 다정하시네요."
- 혜주가 수줍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 "아직 남편은 아니에요."
- 간호사가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 "이렇게 지극정성인데 사랑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이네요. 결혼도 시간문제겠어요. 두 분, 정말 잘 어울려요."
- 나는 여전히 붉은 피가 배어 나오는 상처를 감싸 쥔 채, 어정쩡한 자세로 옆자리에 앉아 간호사가 기계적으로 소독하고 붕대를 감아주도록 내버려 두었다.
- 생살을 찢는 듯한 통증에 입술을 꽉 깨물고 새어 나오는 신음을 억지로 삼켰다.
- 그때, 강세혁의 차가운 시선이 내게 와 닿았다.
- "좀 조용히 할 수 없어? 그렇게 호들갑 떨 만큼 아픈 것도 아니잖아. 불쌍한 척해서 시선 끌 생각일랑 접어."
- 얼음장같이 차가운 그의 얼굴을 보니, 장장 7년에 걸친 우리의 연애가 그의 머릿속에선 통째로 지워진 것만 같았다.
- 나는 구역질이 날 것 같아 시선을 돌려버렸다. 더는 그 얼굴을 1초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 예전의 나는 그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었는데.
- 그의 곁이라면 어디든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 때때로 철없이 굴어 그의 심기를 건드려 잔소리를 들을 때면, 장난스럽게 혀를 쏙 내밀고 어리광을 피우며 그의 곁을 맴돌았다.
- 친구들은 종종 혀를 찼다. 사랑에 눈이 멀어 자존심도 다 버렸다고. 하지만 난 그따위 말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 내가 얼마나 엄살이 심하고 아픔을 무서워하는지, 강세혁이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 과거의 그는 "바보같이 또 다쳤어? 칠칠맞기는." 하고 핀잔을 주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조심스러운 손길로 소독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여 주곤 했다.
- 하지만 그 나른하고 다정했던 손길은 이제 내 것이 아니다.
- 사라진 게 아니라, 고스란히 혜주에게로 옮겨갔을 뿐이다.
-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고통에 겨워 제 손등을 피가 나도록 깨물고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도 신음 한 번 뱉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 치료가 끝났을 때, 억눌렀던 손등 위에는 선명하고 깊은 잇자국이 남아 있었다.
- 진료실을 빠져나오자마자 혜주가 내 앞을 막아섰다.
- "언니, 너무 화내지 마. 난 정말 언니 안 원망해."
- 그녀의 입가에는 짙은 조소가 비릿하게 걸려 있었다.
- 나는 혐오스러운 벌레를 보듯 쏘아보았다.
- "그 역겨운 수작 좀 집어치우지?"
-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혁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 혜주는 재빨리 겁먹은 척 그의 넓은 등 뒤로 숨어들었다.
- "세혁 오빠, 예슬 언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 내가 오빠 뺏어갈까 봐 불안해서 저러는 거니까."
- 세혁의 서늘한 시선이 나를 향해 꽂혔다.
- "백예슬. 아까 그 난장판으로도 성에 안 차? 기어이 혜주를 더 괴롭혀야 직성이 풀리겠어?"
- 혜주는 그의 등 뒤에서 소리 없이 비웃음을 흘리며, 애교 섞인 콧소리를 냈다.
- "아마 내가 오빠한테 너무 딱 붙어 있어서, 언니가 자꾸 날 혼내고 싶은가 봐. 에휴, 다 내 잘못이지 뭐."
- 세혁이 짧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시선에는 내가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짙은 경멸이 서려 있었다.
- "결혼 얘기는 없던 걸로 하지. 백연그룹과 혼맥을 맺기로 한 건 사실이지만, 그 상대가 반드시 너여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고 있는 혜주의 얼굴을 보자, 그동안의 모든 발버둥이 지독하게 허무해졌다.
- 나는 한때 그를 미치도록 사랑했고, 내 모든 것을 내어주며 그에게 맞췄다. 하지만 이런 비참한 나날들은, 오늘로 끝이다.
-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그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 "좋아. 그렇게 해."
- 당혹감으로 굳어버린 남자를 남겨둔 채 병원을 빠져나온 나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완벽하게 세탁된 새 신분 하나 만들어 줘. 한국을 뜰 거야."
- "최소 3일은 걸리는데."
- "좋아,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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