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6화 결혼기념일에 내민 이혼서류

  • 한다은의 시점
  • 저택이 눈앞에 서 있었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처럼. 5년 동안 이곳은 내 감옥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 집이라고 억지로 믿고 살았다. 하지만 오늘 돌아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모든 걸 끝내러 온 거였다.
  • 윤태혁은 내가 직접 오는 걸 끝까지 못마땅해했다. 아까 집을 나서기 전에도 그랬다. 내가 신발을 신자,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내 팔을 붙잡았다. 마치 내가 정말 떠나버릴까 봐 겁난 사람처럼.
  • “정말 직접 갈 거야?” 그가 물었다.
  • “변호사가 이혼서류 전달하면 되잖아. 굳이 네가 갈 필요 없어. 박태식이랑 백도식도 붙여줄 거고. 혼자 들어가지 마.”
  •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지만, 가슴 안쪽은 계속 쿡쿡 아려왔다. 강태준은 분명 우리가 오늘을 함께 축하할 거라고 믿고 있을 거다. 그러니 이혼서류를 건네기엔 오늘만큼 좋은 날도 없었다.
  • 저택 앞에 서서, 나는 일부러 천천히 숨을 골랐다. 경호원 셋이 그림자처럼 내 뒤를 따라붙었다. 박태식, 백도식, 그리고 윤태혁 쪽에서 온 다른 한 명. 안으로 들어서며 나는 고개로 신호를 줬다.
  • 거실은 비어 있었다. 그래도 강태준이 여기 있다는 건 알았다. 그 남자 흔적은 늘 집 안에 남아 있었다. 닫힌 방 안에 퍼진 연기처럼, 끈적하고 숨 막히게.
  • “위층으로 올라가.” 나는 경호원들에게 말했다. 목소리는 흔들림 없었다.
  • “내 물건 전부 챙겨. 하나도 남기지 마. 침실 옷장, 서랍, 보석함까지 전부. 드레스 한 벌도 두고 오지 마.”
  • 그들은 군말 없이 움직였다. 나는 소파에 앉아 벽에 걸린 액자를 바라봤다. 서아의 사진이었다. 아기였던 아이는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시간이 그 순간에 멈춰버린 것처럼. 서아는 떠났는데 사진만 남아 있었다. 영영 아물지 않는 상처처럼.
  • 나는 목 안으로 뜨거운 숨을 삼켰다.
  • 그 순간, 위층에서 거친 소란이 터졌다.
  • “너희 누구야!” 곧이어 쿵쿵 울리는 발소리가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 그리고, 그가 나타났다.
  • 강태준이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상체는 맨몸이었고, 허리엔 타월만 대충 걸쳐져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나를 보자 눈빛이 확 밝아졌다. 순간만큼은 소년처럼 들뜬 얼굴이었다.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만큼.
  • “다은아!” 강태준이 웃었다. 익숙한 자신감이 입가에 번졌다.
  • “오늘 진짜 예쁜데?” 그는 자연스럽게 나를 끌어안으려 팔을 벌렸다. 여전히 몇 마디면 내가 다시 자기 품으로 돌아올 거라 믿는 얼굴이었다.
  •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몸이 단단하게 굳었다.
  • “강태준.” 나는 딱 이름만 불렀다.
  • 그의 얼굴에 떠올랐던 여유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입가에 걸린 웃음도 그대로 굳어버렸다.
  • “일주일 내내 너 기다렸어. 갑자기 연락도 없이 사라지더니—그리고, 저 사람들은 또 누구야?” 그의 시선이 계단 쪽으로 스쳤다. 경호원들이 올라간 방향이었다. 목소리에 의심이 배어들었다.
  • 나는 물러서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고 그에게 내밀었다.
  •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봉투를 낚아챘다.
  • “이게 뭐야?”
  • “가능한 빨리 사인해.” 나는 담담히 말했다.
  • “이후 절차는 내 변호사가 진행할 거야.”
  • 그는 봉투를 거칠게 뜯어 첫 장을 훑더니, 곧바로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 “이게 대체 무슨 장난이야? 이혼? 너—” 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 “네가 나랑 이혼하겠다고? 진짜 웃기네.”
  • “농담 아니야.”
  • 그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마침내 가면이 벗겨진 것처럼.
  • “네가 원한다고 마음대로 떠날 수 있을 것 같아?” 그는 대리석 바닥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 “이 집—내 거야. 네가 직접 내 앞으로 넘긴 거잖아. 기억 안 나? 상속받은 돈도, 네 통장도, 가진 것 전부 다 나한테 줬잖아. 회사 시작 자금도 네 돈이었고, 다은아.
  • 근데 지금 봐. 이젠 네가 감히 상상도 못 할 만큼 커졌어. 펜을 쥐여준 것도 너고, 권력을 넘긴 것도 너야. 근데 내가 그걸로 널 여왕라도 만들어줄 줄 알았어? 아니. 넌 스스로를 내 종속물로 만든 거야.”
  • 그가 비웃으며 성큼 다가왔다.
  • “이제 와서 나 없이도 살 수 있는 척하겠다고? 웃기지 마. 난 절대 널 못 떠나게 해.”
  • 나는 그의 고함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날카롭고 잔인한 말들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나는 웃었다.
  • 처음엔 그저 피식, 참지 못하고 새어나온 웃음이었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더 우스웠다.
  •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린 결혼을 살려보겠다고 몇 년이나 매달렸던 일. 끝난 사랑에 혼자 숨을 불어넣으려 발버둥쳤던 시간들. 그리고 나를 그저 자기 인생 속 역할 하나쯤으로만 여기는 남자에게 사랑의 부스러기라도 얻고 싶어서 비참하게 매달렸던 내가.
  • 너무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 내 웃음이 커졌다. 방 안을 메울 만큼 울렸다. 그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당황한 기색이 스치듯 지나갔다.
  • “미쳤냐?” 그가 내뱉었다.
  •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웃음이 남아 있었다.
  • “아니, 강태준. 이제야 제정신이 든 거야.”
  • 나는 너무 오랫동안 눈이 멀어 있었다. 결혼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이미 모든 건 시작됐다. 그의 무심함, 차가움, 경멸. 하지만 나는 끝까지 못 본 척했다.
  • 일 때문에 예민한 거라고. 스트레스가 심해서 그런 거라고. 사랑 표현 방식이 원래 서툰 사람이라고. 늘 그의 편에서 변명해줬다. 그런데 이제야 알겠다. 그에게 나는 처음부터 아내가 아니었다. 그냥 필요할 때 쓰는 존재뿐이었다.
  •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봤다. 웃음이 잦아들며 침묵이 내려앉았다.
  • “의존 얘기하고 싶어?”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하나 알려줄게, 강태준. 네 눈 한 번 받겠다고 밥 차리고 웃고, 어떻게든 네가 날 자랑스러워하게 만들려고 애쓰던 그 한다은—이제 없어.”
  • 그가 다시 비웃었다.
  • “밖에서 한 달도 못 버텨. 널 원하는 사람도 없어. 네가 가진 게 뭔데, 응?
  • 네 그 향수 놀이나 하면서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아? 결국 다시 기어들어와 나한테 매달리게 될 거야. 넌 원래 그런 사람이잖아.”
  •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그에게 성큼 다가갔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처음으로, 나는 더 이상 그가 무섭지 않았다.
  • “어쩌면 진짜 오래 버티지 못할 수도 있겠지.” 나는 인정했다.
  • “어쩌면 처참하게 무너질 수도 있어. 그래도— 사슬에 묶인 채 배부르게 사느니, 자유롭게 굶어 죽는 쪽을 택할 거야.”
  • 그의 콧방울이 벌렁였다. 옆에서 주먹이 꽉 쥐어졌다.
  • “넌 못 가. 난 절대 너 못 보내.”
  • “넌 이제 나한테 아무것도 명령할 수 없어.”나는 비스듬히 웃었다.
  • 잠깐,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공기가 목을 죄는 것 같았다. 그의 허리에 걸친 타월이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분노에 완전히 잠식당한 얼굴이었다.
  • 나는 고개를 약간 기울이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 “하나만 물어보자, 강태준.”
  •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쏘아봤다.
  • “뭔데.”
  • 나는 질문을 천천히 던졌다. 의도적이고, 치명적으로.
  • “서아가 죽던 그날 밤, 너 어디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