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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가장하는 기술

  • 강태준 시점
  • 서혜린은 내가 좋아하는 그 빨간, 조그마한 란제리만 입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레이스는 거의 숨길 게 없었고, 걘 그걸 나무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서랍 쪽으로 몸을 숙였다. 내가 한다은과 함께 찍은 웨딩 사진을 몰래 집어넣어둔 바로 그 서랍이었다. 그리고 화장품 파우치를 꺼내더니 익숙한 손놀림으로 천천히 눈썹을 그리기 시작했다.
  • “나 좀 찜찜해.”
  • 그녀가 갑자기 말하며 몸을 반쯤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 “응.”
  • 나는 대충 대답했다. 휴대폰으로 메일을 넘기며 숫자, 마감, 계약서 같은 것들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잔소리에 신경 쓰는 것보다 그게 훨씬 쉬웠다.
  • 그녀가 말문을 닫았다. 처음엔 알아채지 못했는데 우리 사이에 뻑뻑한 침묵이 흐르더니 고개를 겨우 들었을 때, 그녀는 마치 토라진 아이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 “미안, 자기야”
  • 과장된 한숨과 함께 휴대폰을 무심히 던지며 중얼거렸다. 늘 통했던 표정을 지으며서 미안한 척, 살짝 죄책감 어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녀는 언제나 녹아내리니까.
  • “아까 뭐라고 했지?”
  • 그녀가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양팔을 가슴 밑으로 모아 더 돋보이게 했고 전형적인 서혜린의 매력이 뚝뚝 떨어졌다. 나랑 말다툼을 하면서도 유혹은 절대 멈추지 않는 그녀였다.
  • “가끔은 당신이 내 몸만 사랑하는 것 같아.”
  • 그녀가 입술을 꼬집으며 시선을 아래로 흘리면서 막장 드라마 오디션 보는 배우처럼 떨리는 입술로 중얼거렸다.
  • 나는 눈을 굴릴 뻔했다. 또 시작이네.
  • 대신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췄다.
  • “그건 상처받을 말이다.” 상한 자존심이 배어 나온 톤으로.
  • “왜 그런 말을 해? 네 몸이 멋진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다은을 버리고 너한테 왔겠어?”
  •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사르르 풀렸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 “미안해.”
  • 그녀가 속삭였다.
  • “그냥… 괜히 불안했어.”
  •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손등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비록 나한테는 1도 비용 안 드는 제스처지만.
  • “괜한 걱정 말라니까. 넌 내가 원하는 전부야.”
  • 그녀가 안도하는 미소를 머금고 다시 일어나서 화장품을 마저 발랐다.
  • “그래… 아무튼 아까 하려던 말은...좀 미안했어. 어젯밤 내가 좀 심했던 것 같아. 그냥 네가 너무 안쓰러워서 그랬거든.”
  •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나는 침대 머리판에 몸을 기댔다. 어젯밤 한다은의 놀란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볼에서 피가 쫙 빠지는 순간, 진실이 꽂히자 눈이 커지던 그 표정.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 밑바닥엔, 그녀가 무너지는 걸 보는 나만의 이상한 쾌감도 섞여 있었다.
  • “아니야, 과한 거 하나도 없어.”
  • 나는 서둘러 부드럽게 말했다.
  • 서혜린은 눈썹 펜슬을 내려놓고 머리를 살짝 만지며 안도하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 “당신이 말했잖아. 그 여자는 못된 아내라고. 욕심 많고, 이기적이고, 뭐 그런 거. 근데 어제 보니까 너무 순해 보이더라. 눈가가 젖는 거 보니까 진짜 미안해지더라니까.”
  • 그 말에 귀가 쫑긋 섰다. 몸을 조금 세웠다.
  • “울었어?”
  • “막 엉엉 운 건 아니고.” 서혜린이 급히 정정했다.
  • “근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어. 솔직히… 내가 미리 모르고 봤으면 진짜 천사 같은 애인 줄 알았겠다. 그렇게 나쁜 짓 할 사람처럼 안 보이던데.”
  • 가슴 안에서 기묘한 쾌감이 뒤틀렸다. 한다은이 나 때문에 울 뻔했다고. 한심하지.
  • “천사라니?” 내가 비죽 웃었다.
  • “사람들 앞에서 나를 후려친 건 못 봤잖아. 1초도 안 망설였지. 내가 매일 그런 걸 겪었다고. 난 여자 안 때려. 근데 한다은은? 손이 올라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 서혜린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손질된 손이 입술 쪽으로 올라갔다. 곧 표정이 연민으로 풀렸다. 그녀가 애교 섞인 소리를 내며 내 볼에 입을 맞췄다.
  • “아이고, 자기야. 걱정 마. 우리 결혼하면 다 나아질 거야. 내가 당신 챙길게.”
  • 그말 듣고 보니 나는 웃었다. 그녀와 결혼한다는 생각만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그녀가 블라우스를 잠갔다. 방금 전까지 내가 즐기던 몸을 다시 가렸다. 아쉬울 수밖에 없지. 낮에 나가려 할 때마다 그녀의 가장 좋은 부분은 늘 가려졌다.
  •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공중에 향수를 칙 뿌렸다. 괜히 잘 보이려고 10대처럼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난 끝까지 연기했다. 문까지 바래다 줬다.
  • “그래서...”
  • 그녀가 치마를 정리하며 비웃듯 말했다.
  • “오늘 대표님은 회사 안 가? 나쁜 남자네.”
  • 나는 작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 “가끔은 대표님도 뒹굴 권리가 있지. 뭐랄까… 스트레스 풀린걸로?”
  • 그녀가 웃으며 한 번 더 키스했고 드디어 아파트를 나갔다.
  • 문이 딸깍 닫히는 순간, 내 미소도 싹 사라졌다.
  • 조금만 더, 그녀 아버지가 계약서에 사인할 때까지만. 그다음부터… 그녀는 그저 짐덩어리일 뿐이었다.
  • “우리 결혼하면…”
  • 그녀 말이 머릿속에서 다시 메아리쳤다. 소름이 돋았다. 절대 아니었다. 지금도 간신히 참아 내는 중인데. 밥 한 끼 제대로 못 한다고 내가 왜 한다은 대신 그녀를 택하겠어?
  • 한다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어젯밤 집에 안 왔다. 아마 아직도 토라져 있을 거다. 늘 오버하잖아.
  • 나는 짜증 섞인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녀 손이 내 뺨을 때리던 기억은 아직도 따갑게 남아 있었다. 따끔한 통증과 둘러선 사람들의 일제히 터진 탄성...완전 망신이었다.
  • 근데 그녀 눈에는 다른 것도 있었다. 화뿐 아니라 아픔도 있었다.
  • 적어도 동료들 앞에서 날 때릴 배짱은 있었다는 거니까. 창피하긴 했지만, 그래도 용서해 줄 거다. 이번 한 번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픈 거라고.
  • 그리고 아프다는 건, 결국 아직 날 신경 쓴다는 뜻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