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다음 화
버림받은 아내의 반격

버림받은 아내의 반격

The swirling quill

Last update: 1970-01-01

제1화 끝의 시작

  • 한다은의 시점
  • “찰싹!”
  • 그 소리가 홀 안을 가르며 터졌다. 날카롭고 잔인하게. 그와 함께 한숨을 참는 소리가 대리석 벽 사이로 메아리쳤다.
  • 내 뺨이 화끈하게 얼얼해졌다. 그러나 나를 얼어붙게 만든 건 통증이 아니었다.
  • 굴욕이었다.
  • 드레스 위로 튄 와인의 끈적한 붉은 얼룩이 선명했다. 내 손에서 떨리던 케이크는 미끄러지듯 바닥에 떨어져 서걱서걱 깨진 조각과 크림으로 흩어졌다. 그 순간,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내게 들이대는 놀란 눈빛이 납덩이처럼 내 가슴을 짓눌렀다.
  • 그리고 그의 눈빛.
  • 아니, 정확히 말하면
  • 내 남편 강태준은 나를 전혀 보지 않았다.
  • 내 앞에 선 그 여자—
  • 그 불륜녀는 비웃음을 띠고 있었다. 방금 뺨을 올려친 손은 허공에 멈춰 있었고 샹들리에 불빛 아래 빛나는 긴 빨간 손톱은 그 선혈 같은 립스틱 색깔과 같이 잔인하게 번뜩였다. 진하게 뿌린 향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질척하고 숨 막하는 기운이었다.
  • 그녀가 살짝 다가서면 독을 흘리듯 말했다. 일부러 회사 주주들, 손님, 직원까지 다 듣을 수 있게.
  • “여긴 네 자리 아니야. 꼴 좀 봐.” 그녀가 코웃음쳤다.
  • “아등바등 초라하게 매달리네.”
  • 그 말이 내 뺨보다도 더 깊게 베어 들어왔다. 칼로 찌리듯이 자존심 상한 느낌이었다 .
  • 나는 얼어붙은 채 꼼짝도 못했다. 가슴은 얕게 들썩였고 숨이 가빠왔다.
  • 그를 찾아야겠다.
  • 내 시선은 맞은편에 선 강태준을 붙잡았다. 그는 빳빳한 수트를 입은 주주들 가운데 감싸여 있었다.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읽을 수 없었다.
  • 그래도 나는 기다리고 있고 마음속으로 묵묵히 기도했다.
  • 제발... 일어나서 뭘 좀 말해. 모두에게 너의 아내라고...
  • 그 다음 순간, 그는 일어났다. 내 심장은 쿵 뛰기 시작했고 희망이 번쩍였다.
  • 그러나 그가 향한 곳을 보고 알았다. 그가 나한테 오지 않는다는걸.
  • 강태준은 그녀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마치 그녀가 자신이 따낸 트로피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 곁에 자리를 차지했다.
  • 팔을 그녀의 허리춤에 자연스럽게 둘러 손가락 하나하나가 등허리의 작은 굴곡을 타고 흘렀다. 그의 입술은 그녀의 귓가에 닿아 속삭였다. 온 세상에 여자란 그녀 하나뿐인 것처럼.
  • 홀을 가르듯 지르는 소리가 다시 한 번 퍼져 나갔다. 훨씬 더 날카롭고 예리했다. 내 무릎이 꺾일 뻔했다.
  •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 “한다은, 그만 체면 구기고 집에 가.”
  • 그 말 듣고 보니 심장은 턱 멎었고 힘이 빠져나갔다.
  • 이게 마지막이었다. 우리 결혼을 붙잡으려던 내 마지막 시도였다.
  • 아이를 잃은 그 아픔 이후에도, 강태준의 무심함에도, 나는 계속 애써 웃었다. 산산조각난 마음을 어떻게든 이어 붙이려 했다.
  • 하지만 이제 깨달았다. 이건 내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걸.
  • 오늘은 축하하려던 날이었다.
  • 케이크는 직접 구우려고 몇 시간을 들여 반죽하고 계량했다. 강태준의 성취 하나하나를 담고 싶었다. 그의 회사가 드디어 국내 영향력 상위 스무 곳 안에 들었다. 그가 이 자리까지 오기 위해 달려온 세월은 길고도 힘들었다.
  • 나는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나는 언제나 그 옆에 있겠다는 걸.
  • 그러나 결과는 이 꼴이었다.
  • 불륜녀에게 뺨을 맞고 남편에게 사람들 앞에서 버림받았다.
  • 내 시야 속으로 방이 비스듬히 기울어졌고, 마치 심판이라도 하듯 쏟아지는 시선들 사이로 모든 낯선 얼굴들이 흐릿하게 번졌다.
  • 그래도 나는 허리를 곧게 펴고 마음을 다잡았다.
  • "여기서 울면 안돼.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그들한테 비웃음 당할거야."
  • 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손이 이미 나가 있었다. 강태준의 뺨을 가격하는 손바닥 소리가 홀을 가르듯 울려 퍼지자, 그때까지 이어지던 모든 속삭임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 그가 눈을 크게 떴다. 분노가 아니라 충격이었다.
  • 내가 반격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 나는 그가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않고 몸을 돌려 그대로 걸어 나갔다. 대리석 위 하이힐 소리가 마치 총성처럼 튀어 올랐다. 짓밟힌 케이크를 넘고,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를 넘고, 허비된 오 년을 넘어.
  • 그렇게 걸어 나갔다.
  • 밤바람이 주먹으로 후려친 듯이 얼굴을 때렸다. 눈물 자국으로 얼룩진 내 볼을 차갑고 매섭게 스쳐 지나갔다. 나는 결국 버티지 못했다. 눈물이 뜨겁고 급하게 쏟아져 나왔고, 마스카라는 번지고 뺨은 흥건히 젖었다. 번쩍이는 도시 불빛 속을 비틀거리며 걸었다. 네온사인은 빛줄기로 흐릿했고 경적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지나가던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 그래도 나는 그저 앞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 걸을 수밖에 없었다. 멈추면 곧바로 무너질 거라는 걸 알았다.
  • 흐느끼는 사이, 손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무시하려 했다가 화면에 뜬 그 이름이 내 온몸을 굳어지게 만들었다.
  • “비비”
  •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전화기를 받을 때 엄지손가락이 떨렸다.
  • “다은?”
  •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으며 오히려 느슨하기까지 했다. 이상하리만큼 느슨했다. 마치 모든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 "끝냈다는 건 알겠지만, 우리는..."
  • 내 울먹임에 그의 말을 끊었다. 우리 사이의 침묵이 무겁고 위험하게 짓누러 왔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말투가 달라졌다. 더 차갑고, 더 강압적이었다.
  • “어디야?”
  • 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숨은 가쁘고, 목은 메였고, 말은 울음에 부서졌다.
  • “한다은.”그가 다시 불렀다. 이번엔 더 단호하게.
  • “어딨는지 말해.”
  • 나는 눈물을 삼키며 힘겹게 숨을 들어쉬었다. 아찔한 혼란 속에서, 마침내 한 단어를 내뱉었다.
  • 그 순간, 수화기 너머 그의 숨이 멎었다. 그러고 나서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만 남겼다.
  • “거기 있어.”
  • 전화가 뚝 끊겼다.
  • 나는 멍하니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눈물이 반짝이는 화면에 한 방울씩 떨어졌고 심장은 그때보다도 더 거칠게 내달리고 있었다.
  • 두 시간이 이렇게 빠르게 흘러가는 줄 몰랐다. 네온사인이 흐릿한 한 바에 들어갔다. 평소라면 발조차 들이지 못했을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찢긴 드레스도, 소문도, 강태준의 배신조차도.
  • 문을 열고 들어가 스툴에 털썩 앉았다.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쏟아지고 있었다. 공기 속엔 담배 냄새와 싸구려 위스키 향이 가득했고 음악은 낮고 리듬감 있게 울려 퍼졌다.
  • “위스키.” 나는 쉰 목소리로 바텐더에게 말했다.
  • “센 걸로.”
  • 첫 잔이 불처럼 목을 타고 내려갔다. 속에 있는 상처까지 태우는 듯했다.
  • 두 번째 잔은 날카로움을 무뎠다.
  • 세 번째 잔은 세상을 멀게 했다.
  • 한 모금 한 모금이 구원이었다. 그 불길이 강태준이 다른 여자의 등을 짚은 장면을 지워 주길 바랐다.
  • 시야가 흔들렸다. 마스카라가 얼굴에 검은 자국을 남겼고. 내 손은 바 카운터에 의지한 채로도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다음 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 “안녕, 다니.”
  • 그 애칭에 나는 순간 굳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