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세요? 제가 신 회장님 댁에 찾아가 채아 언니를 위해 선처를 부탁한 뒤, 강 사모님이 저를 해고하셨어요. 설마 선생님께서 뒤에서 시키신 일 아닌가요?”
신재한은 낮은 목소리로 부인했다.
“난 인간 가정부 한 명을 괴롭힐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닙니다.”
이하은은 더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혀끝을 깨물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신 회장님, 제가 지금 얼마나 처참한 처지인지 잘 알아요. 그래서…… 어쩌면 이 아이를 포기하게 될지도 몰라요.”
“포기한다니!”
신재한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하은의 앞으로 순간 이동했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지금 아이를 빌미로 나를 협박하는 건가요?”
“오해하셨어요. 이 결정은 선생님과 아무 상관도 없어요.”
이하은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억눌러 참던 울음이 목소리에 배어 나왔다.
“이 아이는 제가 가진 돈을 전부 쏟아부어 얻은 희망이에요. 저도 정말 낳고 싶어요. 하지만 빚더미에 앉은 가정에서 아이를 태어나게 할 수는 없어요. 그건 너무 이기적인 일이잖아요.”
신재한은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눈빛에는 차가운 기운이 겹겹이 쌓였다.
선천적인 생식 결함 탓에 그가 후손을 얻을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 아이는 지금으로서는 그의 혈통을 이어 줄 유일한 존재였다.
“이하은 씨, 당신 친구도 내 아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알고 있었을 겁니다. 애초에 샘플을 일부러 뒤섞은 것도 내가 내 혈통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걸 확신했기 때문이겠죠.”
“그만하세요!”
이하은은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꾹꾹 눌러 참아 왔던 감정이 마침내 폭발했다.
“신 회장님, 제가 도대체 몇 번이나 설명해야 믿으실 거예요? 선생님 눈에는 모든 우연이 다 누군가의 계략으로 보이나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씀드릴게요. 채아 언니는 샘플을 바꿔치기하지 않았어요. 저도 제 몸에 주입된 샘플이 선생님 것인 줄 몰랐고요! 제가 아이를 포기하려는 건 선생님을 협박해서 빚을 대신 갚게 하려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예요!”
말이 끝나자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가 진료실 전체를 휩쓸었다.
신재한은 계속해서 자신에게 맞서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주위에는 숨 막힐 듯한 냉기가 감돌았다.
“이하은, 당신이 우리 늑대족의 규율을 모른다는 점을 감안해 지금까지 당신의 무례를 몇 번이고 참아 줬어. 하지만 계속 그런 말투로 나를 대한다면, 나도 더는…….”
이하은은 고개를 홱 치켜들고 울먹이며 소리쳤다.
“저를 협박하시는 거예요? 신분이 고귀하다고 해서 마음대로 남을 몰아붙여도 되는 줄 아세요?!”
말을 마친 그녀는 몸을 돌렸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은도 신재한이 자신을 의심하는 데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면, 하은조차 이 모든 상황을 치밀하게 꾸며 낸 함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진료실에는 기나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신재한은 잔뜩 긴장한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문질렀다.
늑대족의 존재를 이제 막 알게 된 평범한 인간 주제에, 자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감히 대들기까지 했다.
백 년 넘게 살아온 동족들조차 그의 앞에서는 이렇게 무례하게 굴지 못했다.
“이하은, 이미 벌어진 일을 두고 계속 따져 봐야 아무 의미도 없어. 차라리 우리 계약 하나를 맺자고.”
이하은은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목소리가 울음에 잠겨 있었다.
“무슨 계약이요?”
“원하는 금액을 말해.”
신재한의 목소리는 무심하면서도 강압적이었다.
“얼마든지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이하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격앙된 목소리로 따졌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돈으로 아이를 사 가시겠다는 거예요?! 제가 지금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해도, 아이를 거래 물건처럼 여기는 사람에게 아이를 넘길 수는 없어요!”
신재한은 옆으로 늘어뜨린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몸속에서 들끓는 사나운 기운을 억지로 억누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이는 내 자식이야. 당연히 내가 키워야 해. 게다가 아이를 포기하려는 네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나를 비난하는 거지?”
“제가 아이를 포기하려는 건 그 애가 저와 똑같은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
말끝에 이르자 이하은은 입 밖으로 꺼내려던 말을 억지로 삼켰다.
그녀는 자신의 비참했던 과거를 누구에게도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신재한은 더는 실랑이를 벌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최후통첩을 내렸다.
“네 마음대로 임신을 중단한다면 즉시 소송을 제기하겠다. 그 아이는 네가 자발적으로 인공수정을 받아 임신한 아이야. 강요당한 것도, 침해를 당한 것도 아니지. 분명히 말해 두겠지만, 법원은 절대 네 편을 들어 주지 않을 거다.”
이하은은 용기를 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소송하시려면 하세요. 제 몸은 제가 결정해요.”
사실 임신을 확인한 순간부터 하은은 아이를 포기하려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신재한은 애써 태연한 척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한 가지 알려 주지. 서울의 모든 사립병원에서 나는 핵심 후원자야. 나를 거스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네게 낙태 수술을 해 줄 의사는 없을 거다.”
이하은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사람을 원망해 왔다.
그중에서도 박민우와 오지윤은 늘 원망의 대상 맨 앞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불과 며칠 사이에 신재한의 이름이 그들을 빠르게 앞질렀다. 이제 그는 하은이 마음속 깊이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 순간, 이하은은 비로소 냉혹한 현실을 똑똑히 깨달았다.
신재한의 눈에 자신은 그저 신분이 한참 아래인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는 여느 최고급 재벌들과 다를 바 없었다. 자신의 권세를 믿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제멋대로 좌지우지하려 했다.
이하은은 눈가에 차오르는 쓰라린 감정을 억누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아이가 태어난 뒤에…… 제가 가정부로라도 아이 곁에 남아서 자라는 모습을 지켜볼 수는 없을까요?”
“안 돼.”
신재한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지금 네게 남은 선택은 하나뿐이야. 양육권 양도 계약서에 서명하고 출산할 때까지 얌전히 몸을 돌봐. 네가 말 잘 듣고 협조하기만 하면, 모든 빚을 갚아 주고 보수가 높은 일자리도 마련해 주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친구가 해고된 건 업무상 실수 때문이야. 고의였든 아니었든, 내 샘플이 네 몸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됐어. 그리고 네가 일자리를 잃은 일은 나도 정말 몰랐다. 강 사장님의 두 아이가 너를 무척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어. 네가 원한다면 원래 일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