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 다음 날 아침.
- 이하은은 간단히 씻고 사립 난임센터로 향했다.
- 가는 내내 아는 친구들에게 계속 연락했다.
- “알겠어. 내 얘기 들어 줘서 고마워.”
- 하은은 지친 얼굴로 통화를 마치고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 아는 사람들에게 모두 도움을 청해 봤다.
- 하지만 빌릴 수 있는 돈을 전부 모아도 박민우가 한도까지 끌어다 쓴 대출금을 갚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 자존심을 내려놓고 사람들에게 손을 벌리는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웠다.
- 한편 조채아는 난임센터에서 정식 해고 통보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센터 내부 규정에 따라 그녀는 더 이상 어떤 난임 진료 업무도 맡을 수 없었다.
- 하지만 경영진은 예외적으로 이하은의 임신 검사만큼은 조채아가 마무리하도록 허락했다.
- 20분 뒤, 이하은은 난임센터 로비로 들어섰다.
- 이곳을 다시 찾은 하은의 마음은 이미 크게 달라져 있었다.
- 열흘 전만 해도 그녀는 새 생명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자신의 아이를 간절히 갖고 싶어 했다.
- 하지만 지금은 곧 알게 될 검사 결과가 두려웠다.
- 진료 구역 층에 도착했을 때, 하은은 문득 낯익은 모습을 발견했다.
- 신재한이었다.
- 그는 유리 벽으로 둘러싸인 회의실에 앉아 여러 고위 관계자와 업무를 논의하고 있었다.
- 하은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 그녀는 멍하니 회의실 안에 있는 남자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 며칠 만에 보는 건데도, 신재한은 지난번보다 더 눈부셔 보였다.
- 하은은 저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 “정말 질투가 날 만큼 완벽하네.”
- 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 하은은 회의실 안의 신재한이 곁눈질로 자신의 뒷모습을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 진료실 문을 열자, 하은은 가장 먼저 눈이 퉁퉁 부은 조채아를 보았다.
-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다.
- “언니, 센터의 최종 통보가 나왔어요?”
- “신재한이 고위 이사진과 최종 처리 방안을 확정하고 있어. 오후면 정식 해고 통지서를 받게 될 거야.”
- 조채아는 눈가가 새빨개진 채 하은을 바라보았다. 코끝이 시큰해졌다.
- “하은아,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지?”
- 하은은 손을 들어 채아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달랬다.
- “일단 당황하지 말고,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우리 보육원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 기억나? 머물 곳이 없어서 종이 상자 안에 웅크리고 밤을 보냈잖아요. 그래도 그런 고생을 견디고 여기까지 왔잖아요.”
- “응.”
- 조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 “너는 요 며칠 몸은 어때? 불편한 데는 없어?”
- 하은은 옆으로 내린 손의 손끝을 살짝 움켜쥐었다.
-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쉰 목소리로 말했다.
- “언니, 오늘 임신한 게 확인되더라도…… 이 아이를 낳지 않을 수도 있어요.”
- “뭐라고?!”
- 조채아는 크게 놀라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 “네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잖아! 어떻게 포기할 수 있어?”
- 채아가 격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하은은 최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아직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며칠 전에…… 고용주 집에서 해고당했어요. 다시 일자리를 구한다고 해도 아이를 키울 능력이 없어요. 앞으로 몇 년 동안 은행 빚을 갚느라 계속 돈을 벌어야 하거든요.”
- 하은은 박민우가 자신의 신상 정보를 도용해 대출을 받은 일을 빠짐없이 털어놓았다.
- 모든 이야기를 들은 조채아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 그녀는 입술을 떨며 목소리를 높였다.
- “박민우, 그 죽일 놈! 양심이라고는 없는 짐승 같은 인간!”
- “하은아, 그래도 지금 당장 결정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임신 초기 기간이 끝나기 전까지는 임신 중단을 선택할 수 있잖아. 지금 포기했다가 나중에 상황이 나아지면 오늘의 결정을 후회할지도 몰라.”
- “내게는 운이란 게 찾아온 적이 없었어.”
- 하은은 씁쓸하게 웃었다.
- “그리고 임신을 계속하는 것 자체도 나한테는 고통일 뿐이에요. 임신 기간이 길어질수록 아이에게 정이 깊어질 텐데, 결국 더 큰 고통을 겪게 될 뿐이에요.”
- 조채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계속 설득했다.
- “어떤 선택을 하든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조금만 더 기다리면서 너 자신에게 기회를 주면 안 될까?”
- 하은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 “검사 결과부터 보고 생각해요. 어쩌면 아예 임신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 “그래.”
- 조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납장에서 밀봉된 무균 채혈 용품을 꺼낸 뒤 하은의 혈액을 조금 채취했다.
- 10분 뒤, 검사 결과가 나왔다.
- 조채아는 컴퓨터 화면에 표시된 붉은색 수치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 그녀는 옆에서 결과를 기다리던 하은을 돌아보며 웃었다.
- “하은아, 축하해. 혈액 검사 결과 임신이야.”
- 하은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해 두었다.
- 그런데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차올랐다.
- 지난 3년 동안 그녀는 이 말을 듣기를 줄곧 바랐다.
- 기쁨과 고통이 뒤엉켜 서로 반대되는 두 감정이 그녀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 하은은 목구멍에서 겨우 몇 마디를 짜냈다.
- “정말……?”
- “당연하지! 자, 초음파 검사도 해 보자. 네 눈으로 직접 아기집을 볼 수 있을 거야.”
- 조채아는 다가와 떨리는 하은의 오른손을 잡았다.
- 하은은 입술을 꼭 다문 채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아직 너무 이른 거 아니야?”
- “걱정 마. 우리 난임센터에서 쓰는 건 최첨단 고정밀 자궁 초음파 장비야. 아기집의 초기 형태까지 확실하게 관찰할 수 있어.”
- 그 말을 듣고 하은은 얌전히 진료 침대에 누웠다.
- 그녀는 떨리는 손끝으로 상의를 들어 올려 평평한 아랫배를 드러냈다.
- 조채아는 초음파 기기를 침대 옆으로 가져와 하은의 배에 초음파 젤을 바른 뒤, 기기의 검사 부위를 피부에 댔다.
- 곧 영상이 벽에 걸린 화면에 실시간으로 나타났다. 작은 아기집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 하은은 그 아기집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눈물이 소리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하지만 조채아의 표정은 점점 무거워졌다.
-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낮게 중얼거렸다.
- “이상한데…… 정상적인 초기 임신이라면 아기집이 이렇게 선명하게 보이지 않을 텐데.”
- 하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그녀는 긴장한 채 고개를 들어 조채아를 바라보았다.
- “그게 무슨 뜻이야? 배아에 문제가 있다는 거야?”
- “영상 데이터로 보면…….”
- 조채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진료실 문이 갑자기 거칠게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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