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 하은은 휴대전화를 꺼내 오지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 전화벨이 한 번 울리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하은아, 무슨 일이야? 왜 전화했어?”
- 수화기 너머로 오지윤이 일부러 부드럽게 꾸민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하은은 빙빙 돌려 말하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이고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 “지윤아, 너 민우랑 사귀는 거 맞지?”
- 전화기 너머로 긴 침묵이 흘렀다.
- 한참 뒤에야 오지윤이 죄책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 “당연히 아니지!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 “그만 연기해. 너희는 내가 바보인 줄 알아?”
- “하은아, 내 말 좀 들어 봐.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 아니야…….”
- “됐어!”
- 하은은 상대의 변명을 매섭게 끊었다.
- “너희가 바람피운 건 이제 관심도 없어. 박민우 지금 네 옆에 있어? 전화 바꿔.”
- 전화기 너머의 오지윤은 잠시 당황한 듯했다.
- 이내 정신을 차린 그녀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 “정말 신경 안 쓴다고? 내가 민우 아이까지 임신했는데도?”
- 짧은 한마디가 무거운 망치처럼 이하은의 가슴을 내리쳤다.
- 오랫동안 쌓여 있던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했다. 하은은 휴대전화를 으스러뜨릴 듯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
- 그녀는 차갑게 웃었다.
- “그래서? 지금 아주 뿌듯해?”
- 상대가 대답하기도 전에 하은은 말을 이었다.
- “박민우는 네가 임신한 걸 알아? 책임질 용기도 없는 데다, 오랫동안 몰래 약까지 먹여 내 몸을 망가뜨린 남자야. 그런데 넌 대체 뭘 믿고 그 사람이 너한테는 다를 거라고 생각해?”
- “그런 거 아니야. 민우는 진심으로 날 사랑해. 그이는 절대…….”
- “나한테도 처음에는 사랑하는 척했어.”
- 하은은 민우를 감싸려는 지윤의 말을 담담하게 잘랐다.
- 한때는 마음을 무르게 하고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던 달콤한 말들이, 이제 와 돌이켜 보니 우스울 뿐이었다.
- 박민우의 다정한 겉모습 아래 이토록 이기적이고 비열한 인간의 본성이 숨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 하은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낮게 말했다.
- “지윤아, 그 사람은 안정적인 직장 하나 없는데 너랑 네 아이를 무슨 돈으로 먹여 살릴 생각이야?”
- “직장 있어! 삼성증권 직원이고, 연봉도 엄청 높아!”
- 오지윤은 즉시 반박하며 필사적으로 민우를 변호했다.
- “너한테 말하지 않은 건 네가 그 사람 저축을 다 써 버릴까 봐 그랬던 거야. 나한테는 늘 통 크게 써. 명품 선물도 자주 사 준다고!”
- “삼성증권 직원이라고?”
- 하은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하게 비웃었다.
- “오지윤, 넌 정말 순진해서 귀여울 정도네. 네가 말하는 그 고액 연봉, 전부 내 신분을 도용해서 신용카드를 한도까지 긁은 돈이야!”
- “뭐라고?”
- 오지윤이 놀라 소리쳤다.
- “방금 독촉장이 잔뜩 왔어. 그 인간이 내 신분을 도용해서 카드 한도를 초과해 쓰고 대출까지 받은 거야. 이미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야. 너도 네 신용정보를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거야. 다음에 빚더미에 앉는 사람이 네가 될 수도 있으니까.”
- “그럴 리가 없어…….”
- 오지윤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한 가닥 기대가 남아 있었다.
- “민우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야.”
- 깊은 무력감이 하은의 마음속으로 밀려들었다.
- “솔직히 네가 앞으로 어떻게 되든 난 관심 없어. 하지만 네가 정말 아이를 가졌다면, 그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집도 없이 보육원으로 보내지는 일은 없어야 하잖아.”
- 말을 마친 하은은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가까운 경찰서로 향했다.
- 박민우의 배신을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이 엄청난 빚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 ……
- 경찰서 안에는 숨 막히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 “죄송합니다, 이하은 씨.”
- 담당 직원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 안에는 알아차리기 힘든 냉담함과 건성으로 대하는 태도가 숨어 있었다.
- “신고하신 피의자는 이미 출국해서 현재 한국에 없습니다. 현 단계에서는 체포나 수사를 진행하기 어렵습니다. 저희가 발급해 드릴 수 있는 건 사건 접수 확인서뿐입니다. 이후의 채무 분쟁은 금융기관과 직접 협의하셔야 합니다.”
- 하은의 눈에 남아 있던 희망의 빛이 완전히 꺼졌다.
- 그녀는 눈가에 차오른 뜨거운 눈물을 꾹 누르고 작게 감사 인사를 한 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경찰서를 나섰다.
- 차갑고 쓸쓸한 거리에 선 하은은 모든 은행의 고객센터에 차례로 전화를 걸었다.
-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 피의자가 검거되기 전까지 모든 채무와 책임은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마지막 전화를 끊자 하은은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 그녀는 무너져 내리듯 길가에 쪼그려 앉아 입을 틀어막고 울음을 터뜨렸다.
- 어떡하지……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 고용주에게 해고당한 뒤로는 경력 평가와 평판까지 악의적으로 훼손당했다.
- 이제는 그녀를 고용하려는 사람조차 거의 없었다.
- 수입도 저축도 없는 상황에서 월세와 앞으로 필요한 모든 비용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 예전 같았으면 조채아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하지만 지금은 조채아 역시 실직 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런 친구에게 어떻게 또 부담을 지울 수 있겠는가?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은은 마침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그녀는 손을 들어 택시 한 대를 세운 뒤, 쉰 목소리로 집 주소를 말했다.
- 아파트로 돌아온 하은은 생각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무심코 텔레비전을 켰다.
- 그러나 화면이 켜지는 순간, 낯익은 인물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 신재한의 공익사업 인터뷰 생방송이었다.
- 화면 속 남자는 꼿꼿한 자세와 고귀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온화하고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 “월곡보육원 환경 개선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 아이들에게 따뜻하고 쾌적한 생활 공간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지원을 받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성장을 장기적으로 살피며, 기댈 곳 없는 아이들이 안전하게 자라도록 돕겠습니다.”
- 언론이 그에게 찬사와 존경을 보내는 모습을 보자 하은의 마음 한구석이 쓰라렸다.
- 그녀는 어릴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랐다. 의지할 곳 없는 아이들이 얼마나 궁핍하고 막막하게 살아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하지만 지금 하은의 눈에 비친 신재한은 자선가라는 화려한 이미지 뒤에 거짓과 냉혹함을 감춘 사람일 뿐이었다.
- 그의 지위와 권력이라면 수많은 낯선 사람에게 손쉽게 선의를 베풀 수도 있었고, 평범한 사람 두 명을 냉정하게 궁지로 몰아넣을 수도 있었다.
- 어쩌면 그의 다정함은 자신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지도 몰랐다.
- 과거의 박민우처럼.
- 다만 박민우에게는 신재한처럼 뼛속 깊이 새겨진 듯한 기세와 매력이 없었다.
- 하은은 신재한 같은 남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 눈길 한 번만으로도 심장이 빨라지고 뺨이 달아오르게 만드는 남자였다.
- 다음 순간, 하은은 짜증스럽게 텔레비전을 꺼 버렸다.
- 자신은 방금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한 걸까?
-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배후에게 어떻게 설렘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 신재한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최고위 재벌이었다. 반면 자신은 사회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 하은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비우려 했다.
-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자 내일 나올 임신 검사 결과가 다시 떠올랐다.
- 지금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엄청난 빚까지 짊어지고 있었다.
- 검사 결과 임신이 확인된다면, 자신이 과연 이 아이를 세상에 데려와 가난하고 궁핍한 삶을 함께 살아가게 할 자격이 있을까?
- 그날 밤, 하은은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다.
-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선택지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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