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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 최종 임신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엿새가 남았다.
  • 이하은은 달력에 특별히 동그라미를 쳐 둔 날짜를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 엿새 뒤면 자신에게 엄마가 될 자격이 남아 있는지 알게 된다.
  • 하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평소처럼 고용주의 집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일곱 살 강준환과 세 살 강민민, 두 아이를 돌보는 일이었다.
  • 서울에서 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자리였다.
  • 서울은 겨울로 접어들며 날이 갈수록 추워졌고, 이른 아침에는 안개도 짙게 끼었다.
  • 하은이 정원에 들어서자 앳된 목소리 두 개가 동시에 들려왔다.
  • “하은 언니!”
  • 하은은 아이들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 “우리 준환이랑 민민이, 과학관에 갈 준비는 다 했어?”
  • “네!”
  • 강준환은 신이 나서 소리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쳐나갔다.
  • 뒤따라오는 어린 여동생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였다.
  • 하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허리를 숙여 강민민을 품에 안았다.
  • “우리 민민이, 또 살찐 거 아니야? 이제 언니가 안기 힘들 정도인데?”
  • 민민은 고개를 번쩍 들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 “아니거든요! 하은 언니가 너무 마른 거예요.”
  • 하은은 말랑말랑한 민민의 볼을 살짝 꼬집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 사실 하은은 또래 여성들에 비해 몸이 꽤 여윈 편이었다.
  • 대문을 나서며 하은이 시선을 들자, 강준환은 이미 몇 걸음 앞의 길목에 서 있었다.
  • 하지만 준환의 곁에 선 훤칠한 남자를 알아본 순간, 하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신재한이었다.
  • 남자는 재단이 깔끔한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이목구비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도, 190센티미터에 달하는 키에서 남다른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 무언가를 감지한 듯 신재한이 무심한 눈길을 돌렸다.
  • 먼저 하은의 품에 안긴 어린 여자아이를 바라본 뒤,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 단 한 번의 눈길이었지만 하은은 온몸이 굳는 듯했다.
  • 그녀는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민민을 안은 채 천천히 다가갔다.
  • “재한 아저씨, 안녕하세요!”
  • 민민이 작은 이를 몇 개 드러내며 먼저 인사했다.
  • 신재한은 곧장 주위에 감돌던 차가운 기운을 거두었다. 눈매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 “그래, 안녕.”
  • 하은은 그가 아이에게 다정하게 말하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문득 조채아가 알려 준 비밀을 떠올렸다. 신재한에게는 생식 기능에 문제가 있어 친자식을 갖기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 그 사실을 떠올리자 하은의 마음속에 깊은 공감이 피어났다.
  • 이 세상에서 간절히 바라면서도 얻을 수 없는 고통을 자신보다 더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 그때 옆에 있던 강준환이 잔뜩 들뜬 얼굴로 가방에서 새로 산 장난감 비행기를 꺼냈다.
  • 준환은 보물을 자랑하듯 신재한에게 내밀고는 비행기가 어떻게 나는지 진지하게 설명했다.
  • 그러고는 힘껏 던졌다. 장난감 비행기는 손을 떠나 날아가더니 자동차들이 오가는 도로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 누구도 말릴 틈이 없었다. 강준환은 장난감을 주우려고 곧장 도로로 뛰어들었다.
  • 하은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 “준환아! 안 돼! 위험해!”
  • 하은은 민민을 안고 있었기에 아이를 쫓아갈 수조차 없었다.
  • 차들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준환과의 거리는 불과 몇 미터였다.
  • 바로 그 순간.
  • 검은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튀어나갔다.
  • 신재한은 차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긴 팔을 뻗었다. 그리고 강준환을 단숨에 낚아채 안전한 곳으로 끌어당겼다.
  •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가 시끄러운 도로를 찢었다.
  • 승용차는 두 사람의 옷자락을 스칠 듯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 신재한은 품 안에서 멍하니 굳어 있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조금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 “길을 건너기 전에는 반드시 좌우를 잘 살펴야 해. 이렇게 무작정 뛰어들면 안 돼.”
  • 강준환은 눈가를 붉힌 채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배어 있었다.
  • “죄송해요…… 비행기가 차에 깔려 망가질까 봐 그랬어요.”
  • “장난감은 중요하지 않아. 네 안전이 가장 중요해.”
  • 신재한은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준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방금 너 때문에 너희를 돌보는 누나가 얼마나 놀랐겠니.”
  • 강준환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하은을 바라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 “하은 누나, 미안해요.”
  • 하은은 허리를 숙여 몸을 떨고 있는 준환을 안아 주며 부드럽게 달랬다.
  • “다치지 않았으니 됐어. 우리 준환이는 다음부터 절대 이런 일 없을 거라고 믿어.”
  • 그 말을 마친 하은은 신재한을 올려다보며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
  • “정말 감사합니다. 아저씨가 계시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상상도 못 하겠어요.”
  • 신재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는 강준환에게 다시 한번 안전에 유의하라고 당부한 뒤 자리를 떠났다.
  • 짧은 소동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 그 뒤로 강준환은 하은의 손을 얌전히 잡고 다녔다. 다시는 함부로 뛰어다니지 않았다.
  • 밤이 깊어졌다.
  • 하은이 씻고 침대에 누운 순간,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 화면에는 ‘조채아’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 하은이 전화를 받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에서 절망에 찬 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하은아…… 나 해고당할지도 몰라.”
  • 하은은 가슴이 철렁해 서둘러 물었다.
  • “대체 무슨 일이야?”
  • “신재한이 우리 난임센터에 맡겨 둔 정자 샘플 기억하지? 그게 갑자기 사라졌어! 기록상 마지막으로 다룬 사람도, 보관 책임자도 전부 나로 되어 있어.”
  • 채아는 흐느끼며 깊은 무력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하은은 눈을 크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 “어떻게 사라져? 설마 정자 샘플이 다리가 달려서 도망가기라도 했다는 거야?”
  • “누군가 훔쳐 간 게 분명해.”
  • 채아의 목소리는 풀이 죽어 있었다.
  • “하지만 단서를 찾지 못하면 결국 모든 책임이 나한테 돌아올 거야.”
  • 하은은 다급하고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 “언니 잘못도 아닌데 왜 언니가 혼자 책임져야 하는데!”
  • “하은아, 넌 몰라.”
  • 채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 “신재한은 우리 난임센터의 주요 투자자 중 한 명이야. 지금 엄청 화가 나 있어. 원장님은 최대한 빨리 희생양을 찾아서 책임을 떠넘기려는 것뿐이야.”
  • 그 말을 들은 하은은 침묵했다.
  • 일주일 전이었다면, 그녀도 이 일에는 더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하지만 오늘 직접 본 신재한은 다정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누군가의 직업 인생을 함부로 망가뜨릴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신재한은 그저 누군가에게 속았을 뿐이었다. 진실을 모를 뿐이었다.
  • 그리고 조채아 역시 책임감 없이 일을 처리할 사람이 아니었다.
  • 전화를 끊은 하은은 대담한 결심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