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 방에 막 돌아오자마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 보니 권씨 가문의 집사가 원예 장갑 한 켤레를 들고 서 있었다.
- “서아라 씨, 사모님께서 정원 장미를 손봐야 한다고 하십니다. 좀 맡아 주시죠.”
- 말투는 공손했으나 결코 거절할 수 없다는 압박이 섞여 있었다. 서아라의 눈썹이 절로 치켜 올라갔다. 공짜 가정부 취급이라니.
- 서아라는 순순히 장갑을 받아 들었다. 대신 방으로 돌아가 작은 수첩 하나를 챙겨 나왔다.
- “좋아요. 그런데 미리 말해둘게요. 장미 전정은 시간제로 계산합니다. 한 시간에 5만원이에요. 청구는 권태영 명의로 올릴 거예요.”
- 집사가 멈칫하더니 더는 대꾸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 정원의 장미는 제멋대로 뻗어 있었고 가시는 촘촘했다.
- 서아라가 가위질을 몇 번 시작하기도 전에 날카로운 가시가 손가락을 콕 찔렀다. 상처 위로 붉은 피가 송골송골 맺혔다. 서아라는 무심하게 휴지로 피를 닦아내며 계속 가위질을 이어갔다. 그러고는 수첩에 항목 하나를 추가했다.
- [산재 수당: 20만원]
- 정오쯤 되자 최순애가 메이드를 보내 서아라를 불렀다.
- “사모님께서 식당 꽃꽂이를 갈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신선한 백합으로 좀 골라 오시라네요.”
- 서아라는 수첩을 든 채 메이드를 따라 온실로 향했다. 꽃을 이것저것 고르며 그녀가 덤덤하게 말했다.
- “수입 백합 한 다발 2만원, 꽃꽂이 서비스비 5만원. 합계 7만원. 기록 완료.”
- 꽃을 옮기려던 메이드의 손이 순간 굳어버렸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지만 서아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 해 질 무렵, 권태영이 아끼는 개가 갑자기 달려와 서아라의 주위를 빙빙 돌며 요란하게 짖어댔다. 거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온 최순애가 도도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아라 씨, 사탕이 산책 좀 시켜 줘요. 오늘 아직 한 번도 못 나갔거든요.”
- 사탕이는 그 개의 이름이었다. 몸값만 해도 억 소리가 난다던 명견이라고 했다.
- 서아라는 다시 수첩을 펼쳐 한 줄을 더 적어 넣었다.
- [반려견 산책: 5만원. 단, 내 옷을 물어뜯을 시 별도 배상 청구]
- 사탕이의 목줄을 잡고 저택 바깥 잔디를 걷고 있을 때였다. 몇 걸음 못 가 권태영이 차를 몰고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 차를 세우고 내린 그는 서아라의 손에 들린 목줄과 수첩을 번갈아 보더니 표정을 순식간에 굳혔다.
- “서아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낮게 깔린 목소리엔 명백한 분노가 실려 있었다. 서아라는 태연하게 수첩을 흔들어 보였다.
- “장부 적는 중이지, 네 어머니가 시킨 일이니까. 난 공짜로는 일 안 하거든.”
- “여기를, 우리 권씨 가문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 권태영이 서아라의 수첩을 홱 낚아채 펼쳐 보았다. 내용을 확인하는 그의 안색이 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
- “장미 손질 5만원, 꽃꽂이 5만원, 개 산책 5만원? 이럴 거면 차라리 강도질을 하지 그랬어?”
- “강도보다는 채권자가 훨씬 이득이지.”
- 서아라는 수첩을 되찾으려 손을 뻗으며 쏘아붙였다.
- “이건 다 내가 정당하게 받아야 할 돈이야. 네가 나한테 진 빚 100억, 아직 한 푼도 안 갚았잖아.”
- 권태영은 수첩을 꽉 쥔 채 놓아주지 않았다.
- “서아라, 너 왜 이렇게 돈에 집착해?”
- “돈에 집착?”
- 서아라가 비웃듯 싸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 “내가 이렇게라도 안 하면 당신들한테 벌써 짓밟혀 죽었을 테니까. 권태영, 넌 지금 연준이 손가락 하나만도 못해!”
-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위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권태영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 그의 눈빛에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정통으로 얻어맞은 듯한 얼굴이었다.
- 그의 손에서 힘이 살짝 빠진 틈을 타 서아라는 수첩을 빼앗아 왔다. 권태영은 서아라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으나, 끝내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한 채 돌아서서 차를 몰고 떠나버렸다.
- 멀어지는 차 뒷모습을 보며 서아라는 가슴 밑바닥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 그날 밤, 씻고 잠들려던 서아라의 귀에 옆방 권태영의 방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호기심에 문가로 다가가자 어렴풋한 잠꼬대가 문틈 사이로 흘러나왔다.
- “아라 누나, 천천히 먹어. 목 막히겠다...”
- “이 토끼 완성도가 별로네. 하나 더 접어 줄게.”
- 전부 연준이가 월세방에서 서아라에게 하던 말들이었다. 서아라는 문턱에 박힌 듯 굳어 섰다. 속이 갈가리 뒤엉키는 기분이었다.
- 결국, 그는 정말로 잊은 게 아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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