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 서아라는 사탕 포장지로 접은 토끼를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밀어 넣고 손끝으로 원피스 천에 박힌 정교한 무늬를 매만졌다.
- 이 원피스는 딱 봐도 값이 장난이 아니었다. 서아라의 1년 치 월급보다도 비쌀 것이 분명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아라가 계단을 막 내려가는데 거실에서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에 부드러운 눈매를 가진 여자였다.
- “이분이 서아라 씨죠?”
- 그녀가 먼저 일어나 예의 바르게 웃었다.
- “저는 이지원이에요. 태영이한테 아라 씨 얘기 많이 들었어요.”
- 이지원이라는 이름은 진작 들어 알고 있었다. 권태영과 조건이 딱 맞는다는 그 정략결혼 상대였다.
- 서아라는 자신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뭐라도 말을 꺼내려던 찰나, 최순애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 “지원이는 해외에서 막 돌아왔어. 특별히 여기까지 들른 거야.”
- 최순애의 눈길에는 이지원을 향한 노골적인 편애가 묻어 있었다. 그때 서재에서 권태영이 나왔다.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지만 표정은 평소처럼 싸늘했다.
- 이지원은 자연스럽게 다가가 권태영의 넥타이를 정리해 주며 말했다.
- “아침 준비됐어? 네가 좋아하는 크루아상 사 왔어.”
- 그 다정한 손길이 서아라의 눈을 콕 찌르는 듯 아팠다. 서아라는 차마 그 광경을 견디지 못하고 몸을 돌려 빠져나가려 했다. 그런데 이지원이 서아라를 불러 세웠다.
- “아라 씨, 그렇게 급히 가지 말고 우리같이 좀 먹을까요?”
- 식탁에서 이지원은 계속해서 권태영의 접시에 이것저것 챙겨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 “요즘 또 밤새우는 거야? 다크서클이 여기까지 내려왔네.”
- 권태영은 별다른 대꾸는 없었지만, 그녀의 걱정을 당연하다는 듯 묵묵히 받아들였다.
- 서아라는 속이 타는 듯해 우유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자 이지원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을 걸어왔다.
- “아라 씨, 그 가방 참 독특하네요. 요즘 유행하는 니치 브랜드인가요?”
- 서아라의 손이 멈췄다. 그 가방은 과거 연준이 재테크로 번 돈을 모아 선물해 준 것이었다. 열심히 일하는 서아라를 위해 준비한 보상이라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가방...
- 서아라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이었다. 이지원이 “어머!” 하고 짧은 비명을 내뱉더니, 옆에 있던 레드와인 잔을 그대로 서아라의 가방 위로 엎질렀다.
- 진붉은 액체가 순식간에 캔버스 천으로 스며들며 흉측한 얼룩을 남겼다.
- “미안해요, 어쩌면 좋아.”
- 이지원이 허겁지겁 휴지를 꺼내 얼룩을 쓱쓱 문질렀다.
-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손이 미끄러졌어요.”
- 허둥대는 그 모습이 진짜보다 더 그럴싸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최순애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 “지원아, 너 괜찮니? 옷에 튄 데는 없고?”
- 아무도 서아라의 가방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마치 값도 나가지 않는 쓰레기 취급이었다. 서아라는 가방을 문지르던 이지원의 손을 차갑게 눌러 막고는 싸늘하게 웃어 보였다.
- “지원 씨, 급할 거 없으니까 먼저 계산부터 하죠.”
- 서아라는 휴대폰을 꺼내 구매 내역을 화면에 띄웠다.
- “비싼 건 아니에요. 50만원인데 제가 석 달 정도 사용했으니까 감가상각 고려하면 지금 가치는 40만원 정도 되겠네요.”
- 이지원의 얼굴이 찰나의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 “가방 하나 가지고 뭘 그러세요. 제가 더 좋은 새 걸로 사 드릴게요.”
- “그걸로 끝이 아니죠.”
- 서아라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 “이 가방은 저한테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 정신적 손해배상으로 최소 100만 원은 주셔야죠. 그리고 원래 오늘 이 가방 메고 고객 만나러 가려던 참이었거든요. 집에 가서 다시 갈아 메고 가야 하니까 업무 손실비 20만 원, 추가 교통비 5만 원까지.”
- 서아라는 이지원을 똑바로 응시했다.
- “합쳐서 165만 원이에요, 지원 씨. 카드로 하실래요, 아니면 현금으로 하실래요?”
- 거실이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최순애의 안색은 더 나빠질 수 없을 만큼 험악해졌고, 이지원은 입가의 미소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굳어버렸다.
- “아라 씨, 지금 농담하는 거죠?”
- “당연히 아니죠.”
- 서아라는 보란 듯이 손바닥을 펴 보였다.
- “지원 씨가 직접 변상하겠다고 하셨잖아요. 설마 재벌 집 따님이 하신 말씀이 빈말은 아니겠죠?”
- 그때 가만히 지켜보던 권태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감정의 동요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목소리였다.
- “내가 낼게.”
- 그는 휴대폰을 꺼내더니 바로 이체 버튼을 눌렀다.
- “보냈어.”
- 서아라는 곧장 휴대폰을 확인했다. 입금 알림 창에는 165만원, 단 한 푼도 모자라지 않은 금액이 찍혀 있었다.
- 서아라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이지원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 “지원 씨, 보상 고마워요. 그런데 다음부턴 조심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다 저처럼 좋게 넘어가는 건 아니거든요.”
- 서아라는 그 말을 끝으로 미련 없이 돌아섰다. 난처함에 휩싸인 사람들만 거실에 남겨 둔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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