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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 나는 도창수를 향해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는 온기라고는 단 한 점도 섞여 있지 않았다.
  • “룰은 간단해. 가장 높은 값을 부르는 사람이 가져가는 거야.”
  • 나는 장내를 서늘하게 훑으며 선언했다.
  • “단, 한 번의 거래당 오직 한 사람의 자료만 영구 삭제한다. 자, 그럼 시작은 임창수 씨부터 가볼까?”
  • 화면 속에서 임창수의 얼굴이 멈춰 섰다. 불룩하게 튀어나온 술배를 내밀고 주름이 자글자글해지도록 탐욕스럽게 웃고 있는 추한 모습이었다.
  • “임창수 씨, 방금 내 사촌 동생의 그 잘난 ‘첫날밤’을 사겠다고 3,000만 달러를 부르셨죠?”
  • 나는 비릿하게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 “그럼 당신의 그 대단한 명예와 가정을 지키는 데는 얼마를 쓰실 건가요?”
  • 임창수의 얼굴이 터질 듯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의 아내는 집안 배경이 쟁쟁하고 성격이 표독스럽기로 재계에서 유명했다. 이 사진이 그녀의 손에 들어가는 날엔, 그의 인생은 그날로 끝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쥐어짜듯 내뱉었다.
  • “……이건 명백한 협박이야!”
  • “맞아.”
  •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담담히 인정했다.
  • “협박하는 거야.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덕분에 우리 집안의 그 지긋지긋한 사채 빚을 한 번에 털게 됐으니 미리 감사라도 드려야겠네. 어차피 이 돈, 전부 당신들이 자초한 일 아니야?”
  • 시선을 돌려 무대 위에서 사색이 된 한유라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정신이 좀 드는지, 그녀가 나를 가리키며 비명을 질렀다.
  • “한수진! 너 미쳤어? 이러면 나만 죽는 게 아니라 너도 죽어! 집안 망신 다 시킬 셈이야?”
  • “망신?”
  •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 “유라야, 이 사진들 전부 네가 기념으로 남겨야 한다며 나보고 찍어달라고 했던 것들이잖아. 네 성공의 전리품이라며 그렇게 으스대더니, 이제 와서 왜 이래?”
  • 한유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렸다. 그래, 이 모든 기록은 내가 직접 남긴 것들이다. 지난 5년 동안 나는 그림자처럼 그녀를 수행했다. 때로는 비서로, 때로는 세상에 둘도 없는 절친으로 살며 그녀의 온갖 오물을 받아내는 쓰레기통으로 살았다.
  • 유라는 영악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오로지 자신을 치장하는 데만 쏟아부었을 뿐, 단 한 번도 집안의 빚을 갚을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내가 제 말을 고분고분 듣는 멍청한 사촌 언니인 줄로만 알았겠지. 하지만 그녀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내 부모를 닦달해 자기 학비를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첫 고리대금을 떠안게 했던 그 비참했던 날부터, 내가 오직 오늘만을 위해 이 칼날을 갈아왔다는 것을.
  • “이…… 이 미친년이!”
  • 한유라는 분에 못 이겨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비명을 지르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가볍게 몸을 비켜 공격을 피한 뒤,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부러뜨릴 듯 낚아챘다. 그리고 사색이 된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 “진정해, 유라야. 네 가치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 무대 아래, 임창수는 짧은 고뇌 끝에 결심을 굳힌 듯했다. 잿빛으로 변한 얼굴을 경련하듯 떨며 그가 손을 번쩍 들었다.
  • “5,000만! 5,000만 달러면 되겠나!”
  • 나는 가소롭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 “6,000만.”
  • “……알았어! 그렇게 하지!”
  • 임창수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나는 무대 옆에 서 있던 도창수의 부하 중 하나를 가리켰다.
  • “거기, 카드 단말기 좀 가져와 봐.”
  • 부하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나를 한 번, 안색이 잔뜩 굳은 도창수를 또 한 번 번갈아 보았다. 도창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결국 턱 끝으로 가볍게 신호를 보냈다. 내가 어디까지 가나 한 번 지켜보겠다는 속셈이리라.
  • 입금 알람이 울렸다. 임창수의 돈 6,000만 달러가 정확히 꽂혔다. 나는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임창수의 이름이 적힌 폴더를 통째로 휴지통에 처넣고 ‘영구 삭제’ 키를 눌렀다. 그리고 화면을 넘겨 두 번째 사진 속 주인공, 강이현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 “강이현 씨, 이제 당신 차례야.”
  • 강이현은 서른을 갓 넘긴 신흥 재벌이었다. 투자로 떼돈을 벌어들인 그는 아직 미혼이었고, 대외적인 평판과 이미지를 유난히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창백해진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그는 금테 안경을 고쳐 쓰며 태연한 척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 “수진 씨, 구구절절하게 굴지 말고 원하는 가격이나 말해요.”
  • “이현 씨, 역시 성격 시원시원하네.”
  • 나는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노골적으로 훑어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 “당신은 아까 그 노인네보다 젊고, 미혼인 데다 앞날도 구만리잖아? 그만큼 흠집 하나 없는 깨끗한 이미지가 간절하겠지. 8,000만.”
  • 강이현의 매끈한 입꼬리가 보기 흉하게 실룩였다. 장내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공포가 독액처럼 서서히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야 이 인간들도 깨달은 모양이다. 내가 그저 객기나 부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 이건 이 자리에 모인 거물들 모두를 겨냥해 설계된, 아주 정교하고 치밀한 사형 집행장이었다. 그리고 오늘 이 지옥 같은 판을 쥐고 흔드는 주인은, 바로 나였다.
  • 그제야 상황 파악이 끝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아예 무대를 향해 굴러떨어질 듯 몸을 내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 “수진아! 나 네 할머니다! 그 돈, 우리랑 반씩 나눠야 해!”
  • 옆에 있던 셋째 삼촌도 질세라 악을 쓰며 거들었다.
  • “맞아! 근본도 모르는 계집애를 누가 키워줬는데! 당장 그 돈 내놔!”
  • 역겨운 소음이 고막을 찔렀지만, 나는 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채 못 들은 척 시선을 거두었다. 내 눈동자는 여전히 강이현의 미간 사이에 고정되어 있었다.
  • “강이현 씨, 생각 끝났어? 이 사진이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 당신네 홍보팀이 밤새며 리스크 수습하는 데 드는 비용이 과연 8,000만 달러 선에서 끝날까?”
  • 비릿한 내 질문에 강이현의 눈등 근육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