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 심은하는 눈부신 햇살 때문에 잠에서 깼다.
- 눈을 뜨자 따뜻한 흰빛의 천장이 보였다.
- 몸 위에는 가볍고 부드러운 이불이 덮여 있었다.
- 침대 옆에는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의료 장비가 세워져 있었고, 화면 속 숫자들이 규칙적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 심은하의 손바닥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고, 무릎에도 멸균 밴드가 붙어 있었다.
- 그녀가 팔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문가에 서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 남자는 접시를 들고 있었다. 하얀 도자기 접시 위에는 크림 파스타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 짙은 회색 셔츠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는 팔뚝까지 걷어 올린 상태였다.
- 깔끔하게 잡힌 근육선이 드러났다.
- “깼네요.”
- 그는 접시를 침대 옆 협탁 위에 내려놓더니, 아무렇지 않게 서랍에서 새 노트 한 권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 “기억나요? 오늘이 당신이 우리 집에 머문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에요.”
- 심은하는 노트를 받아 펼쳤다.
- 첫 장에는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 “심은하. 나는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른다. 나를 거둬 준 사람은 도한결 씨이고, 위험한 사람은 아니다.”
- 그 뒤에 한 줄이 더 붙어 있었다.
- “내일 내가 잊어버린다면, 다시 이 페이지를 보여 줘요.”
- 심은하는 노트를 덮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 “도…… 선생님?”
- “네. 도한결입니다.”
- 그는 의자 하나를 끌어와 앉았다. 침대에서 두 걸음쯤 떨어진 거리였다.
-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일부러 멀리하려는 느낌도 아니었다.
- “저는 정신건강의학과와 심리학을 전공한 의학 박사예요. 전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 “여기는 제 집이자, 제 개인 요양 시설입니다. 당신은 남쪽 외곽 숲 근처에서 쓰러져 있었고, 제가 지나가다 발견해서 데려왔습니다.”
- “당신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은 이유는, 당신이 의식을 잃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 때문입니다.”
- “가족에게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했어요. 자신에겐 가족이 없다고도 했고요.”
- 심은하는 눈을 한 번 감았다.
- 머릿속에 흐릿한 기억 조각들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 그런데 떠올리려고 애쓸수록 심장이 더 세차게 뛰었다. 가슴이 불안하게 쿵쿵거렸다.
- “죄송해요.”
- 그녀가 입을 열었다.
- “제가 누구인지도 잘 기억이 안 나요.”
- 도한결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몇 번 화면을 넘긴 뒤 그녀 앞에 내밀었다.
- “하지만 저는 당신을 압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도시에서 당신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죠.”
- 화면에는 한 공식 홈페이지의 메인 페이지가 떠 있었다.
- 페이지에는 심 씨 집안의 가족사진과 가족 소식이 가득했다.
- 사진마다 심 회장 부부, 심재민, 심채아가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 보기만 해도 화목하고 완벽한 가족처럼 보였다.
-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봐도, 심 씨 집안에 또 다른 딸이 있다는 내용은 없었다.
- 심은하라는 이름도.
- 사진 한 장도.
- 글 한 줄도 없었다.
- 그 사람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은하의 속이 뒤집혔다. 역겨움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 그녀는 곧장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 “저 사람들 얼굴만 봐도 토할 것 같아요.”
- 도한결은 휴대폰을 거둬 들였다가, 다시 몇 번 화면을 넘긴 뒤 그녀에게 건넸다.
- “심성그룹 공식 홈페이지에 사흘 전 실종자 찾기 공지가 올라왔습니다.”
- 심은하는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 페이지 제목은 이랬다.
- 《심가 장녀 심은하를 찾습니다. 하루 빨리 귀가해 잘못을 인정하길 바랍니다》
- 본문은 그럴듯한 말들로 포장되어 있었다.
- 대충 말하자면, 심가의 장녀가 감정 문제로 가출했고, 가족들이 걱정하고 있으니 하루 빨리 돌아와 문제를 마주하라는 내용이었다.
- 심은하는 그 문장을 가만히 바라봤다.
- 끝까지 다 읽은 뒤, 휴대폰을 다시 밀어 돌려줬다.
- “저 사람들이 찾는 건 심은하라는 도구예요. 딸이 아니라.”
- 그녀는 도한결을 올려다봤다. 눈빛은 단호했다.
- 그 안에는 단 하나의 간절한 부탁만 남아 있었다.
- “저를 사라지게 해 줄 수 있어요? 저 사람들이 저를 못 찾게요. 다시는 심 씨 집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 도한결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그녀를 한참 바라봤다.
- 방 안은 조용했다.
- 들리는 건 모니터에서 규칙적으로 울리는 삐, 삐 하는 소리뿐이었다.
- “할 수 있습니다.”
- 도한결이 입을 열었다.
- “당신의 개인 정보를 완전히 차단해 줄 수 있어요. 대외적으로는 실종자로 등록하고, 사회적 흔적도 전부 지워 버릴 수 있습니다. 심 씨 집안이 아무리 뒤져도 단서 하나 못 찾게 만들 수 있어요.”
- 심은하의 가슴이 조금 놓였다.
- 막 고맙다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 도한결이 너무 차분해서 거의 냉혹할 만큼 담담한 목소리로 그 대가를 말했다.
- “하지만 세상에 공짜 보호는 없습니다. 저는 당신이 제 의학 연구에 협조해 주길 바랍니다. 전체 과정에서 사생활도, 숨기는 것도 없이요. 제 전담 관찰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 “마침 저는 간헐적 기억상실과 신경성 두통을 동반한 증상에 대해 표적 연구를 진행하려고 했습니다. 장기간 생존하는 살아 있는 관찰 데이터가 부족했거든요.”
- 그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목소리는 진지했다.
- “제가 원하는 건 살아 있는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장기 연구입니다. 당신이 동의한다면, 저는 당신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보장하겠습니다. 대신 당신은 외부와 자유롭게 교류할 권리를 잃게 됩니다.”
- 강요도 없었다.
- 함정도 없었다.
- 그저 노골적일 만큼 솔직한 거래였다.
- 심은하는 몇 초 동안 생각했다.
-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 “동의할게요.”
- 심 씨 집안으로 돌아가 다시 고문당하듯 살고, 이용당하고, 결국 망가지는 삶에 비하면.
- 사생활을 잃고 의학 관찰에 협조하는 것쯤은, 지금 그녀가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장 나은 결말이자 가장 이득인 구원이었다.
- 도한결의 눈 밑으로 아주 희미한 빛이 스쳤다.
- 하지만 그것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 “좋습니다. 그럼 우선 푹 쉬세요.”
- 문이 조용히 닫혔다.
- 모니터가 삑, 하고 울렸다.
- 심은하는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새 노트를 펼쳐 오늘의 기억을 적었다.
- “나는 도한결이라는 사람에게 내 몸을 연구 대상으로 맡기기로 했다.
-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이제 안전해진 것 같다.”
- 문틈 밖에서 주방의 버터가 지글지글 익는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 햇살이 그녀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 어쩐지.
- 이제는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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