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 다음 날 이른 아침, 심은하는 온몸이 쑤시는 통증 속에서 눈을 떴다.
- 손바닥에서는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 그녀는 떨리는 손을 애써 눌러가며 노트를 펼쳐 보기 시작했다.
- 기억을 하나하나 정리한 뒤, 심은하는 빨리 끝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 거실로 막 나가자마자, 얼굴이 하얗고 말끔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 심채아는 그 순간 남자 품으로 달려들더니, 애교 섞인 목소리로 일렀다.
- “상우 오빠, 언니가 뭔가 오해한 것 같아. 어제도 나한테 화내고, 또 때렸어…….”
- 남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심채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머리까지 쓰다듬었다.
- 심은하는 그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
- 그녀는 두 사람 앞으로 걸어가 딱 잘라 말했다.
- “네가 한상우 맞지? 나 너랑 파혼할 거야.”
- 그제야 두 사람은 심은하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런데도 서로 껴안고 있던 자세는 풀지 않았다.
- 한상우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 “심은하, 또 무슨 생떼야? 우리 사이가 이렇게 좋은데, 갑자기 왜 파혼 얘기를 꺼내?”
- 심은하는 세상에서 제일 웃긴 농담이라도 들은 듯했다.
- “내 여동생 허리 끌어안고 있으면서 우리 사이가 좋다고? 한상우, 네가 무슨 왕이라도 된 줄 알아? 후궁이라도 들이게?”
- 다정한 척하던 가면이 그 자리에서 벗겨지자, 한상우는 그제야 품에 있던 심채아를 밀어냈다.
- 그는 눈 밑에 스치던 감정을 감추고, 짧게 혀를 찼다.
- “심은하, 너 예전엔 착하고, 얌전하고 말도 잘 들었잖아. 이렇게 삐딱하고 날카로운 말은 절대 안 했어. 대체 왜 이래?”
- 또 이거였다.
- 늘 실체도 없는 ‘예전의 너’를 들먹이며 지금의 그녀를 묶어두려 했다.
- 심은하는 역겨움이 치밀어 오르는 순간, 신경성 두통이 갑자기 터져 나왔다.
- 관자놀이가 찢어질 듯 아팠다.
- 눈앞이 새까맣게 흐려지고, 몸이 크게 휘청였다.
- 하마터면 바닥에 그대로 쓰러질 뻔했다.
- 한상우는 곧바로 차가운 표정을 거두고 빠르게 다가와 그녀를 붙잡았다.
- “왜 갑자기 머리가 아파? 무서워하지 마. 내가 병원 데려다줄게.”
- 그녀가 거절하기도 전에, 한상우는 심은하를 그대로 안아 들었다.
-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가 차에 태우고, 심씨 집안을 떠났다.
- 차가 달리는 내내 한상우는 과거 이야기를 끝도 없이 늘어놓았다.
- 목소리는 억지로 다정한 척했지만, 속은 뻔했다.
- 어떻게든 그녀를 세뇌하려는 거였고, 다시 예전처럼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심은하로 되돌리려는 거였다.
- “너 어릴 때 나한테 잘 붙어 다녔어. 뭐든 내 말만 들었지. 우리 약혼은 어릴 때부터 정해진 거잖아. 예전엔 매일 나한테 시집가고 싶다고 했는데.”
- “작년 크리스마스 기억 안 나? 나한테 선물 사주겠다고 반년 동안 모은 돈을 전부 꺼냈잖아.”
- “사실 네가 그렇게 채아를 미워할 필요도 없어. 네가 채아를 잃어버리게 만든 거라고 해도, 채아는 너 원망한 적 없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적대적으로 굴어?”
- 또 시작이었고 또 그 말이었다.
- 가장 아프게 찌르고, 가장 숨통을 조이는 말.
- 네가 그 애를 잃어버리게 만든 거라고.
- 심은하는 머리에서 밀려오는 극심한 통증 때문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 고통에 몸이 찢겨 나갈 것 같던 바로 그 순간, 봉인되어 있던 장면 하나가 갑자기 심은하의 머릿속을 강하게 스쳐 지나갔다.
- 어린 심은하가 길가에 서서 심채아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 그런데 어린 심채아가 갑자기 힘껏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 그리고 곧바로 심은하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 “아저씨들이 나 좋은 데 데려가 준댔어! 난 너 절대 안 데려갈 거야!!”
- 그 말을 끝으로 심채아는 뒤돌아 곧장 낯선 차에 올라탔다.
- 심은하는 자신이 이렇게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 그럼 이 모든 세월 동안, 이 모든 비난과 매질과 고통은 대체 뭐였단 말인가?
- 심은하가 멍해진 사이에도, 귓가에서는 한상우가 계속해서 그녀의 ‘예전’ 이야기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 결국 심은하가 완전히 폭발했다. 그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었다.
- “사람 말 못 알아들어? 나 기억상실증이야. 아무것도 기억 안 난다고!”
- “나는 내가 두 눈으로 직접 본 것만 믿어! 다시는 나한테 예전 얘기 꺼내지 마!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아!”
- “그리고 너 같은 위선적인 쓰레기랑은 죽어도 결혼 안 해. 그러니까 입 좀 닥쳐!”
- 차가 갑자기 급정거했다. 심은하는 하마터면 앞으로 튕겨 나갈 뻔했다.
- 한상우는 순간 얼어붙었다.
- 그는 몇 초 동안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얼굴에 걸려 있던 다정함이 완전히 사라졌다.
- 차갑게 식은 눈으로 심은하를 바라봤다.
- 그제야 심은하는 주변을 둘러봤다.
- 사방은 잡초가 무성했고, 외지고 황량했다.
- 이미 도심에서 한참 벗어난 뒤였다.
- 처음부터 병원에 데려다줄 생각 따위 없었던 것이다!
- 한상우의 목소리에는 온기 하나 없었다.
- “네가 그렇게 고집을 부리면, 여기서 제대로 머리 좀 식혀. 자연만큼 사람 성격을 잘 다듬는 곳도 없으니까.”
- 그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 조수석 쪽으로 돌아오더니, 심은하의 옷깃을 거칠게 잡아끌어 그대로 땅바닥에 내던졌다.
- 심은하는 차가운 흙길 위로 세게 넘어졌다.
- 이미 성치 않던 무릎이 다시 바닥에 부딪히자, 극심한 통증이 순식간에 온몸을 덮쳤다.
- 손바닥의 상처도 다시 벌어져 피가 흘러나왔다.
- 밀치고 끌려 나오는 와중에, 모든 단서를 적어둔 그녀의 노트가 좌석 틈 사이로 떨어졌다.
- 그건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단서이자,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것이었다.
- 이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심은하에게 남은 유일한 안정감이었다.
- 심은하는 이를 악물고 통증을 버티며 몸을 앞으로 뻗어 노트를 잡으려 했다.
- 하지만 한상우는 그녀가 다시 차에 타려는 줄 알았다.
- 그는 심은하의 손을 꽉 움켜쥐고 뒤로 끌어냈다. 한 발짝도 양보하지 않았다.
- 바로 그때, 한상우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 화면에 뜬 발신자 이름은 선명했다.
- ‘심채아.’
- 한상우는 바닥에 쓰러져 엉망이 된 심은하를 한 번 훑어봤다.
- 그의 눈에는 동정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차에 올라탔다.
- “여기서 제대로 반성해. 언제 네가 잘못했다고 인정하느냐에 따라 언제 돌아갈 수 있는지가 정해질 거야.”
- 엔진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차는 빠르게 방향을 틀더니, 흙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 그는 심은하를 황량한 길가에 혼자 버려두고 떠났다.
- 차가운 바람.
- 뼈까지 저린 통증.
- 머리를 찢는 두통.
- 터진 상처.
- 그리고 얼어붙은 마음.
- 겹겹이 밀려드는 고통이 끝내 심은하를 완전히 짓눌렀다.
- 그녀는 온몸에 힘이 빠졌다.
- 눈앞이 새까맣게 꺼지더니, 질척한 잡초밭 위로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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