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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 심채아는 세상 억울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언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 일부러 언니 곤란하게 하려는 거 아니야.”
  • 그녀는 목소리를 한층 부드럽게 낮추더니, 이해심 많은 척 표정을 꾸몄다.
  • “언니가 먼저 상우 오빠랑 파혼만 해주면, 나 바로 갈게.”
  • 심은하가 대답하기도 전에, 심채아는 서운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 “언니, 화내지 마. 나 진짜 언니 결혼 뺏으려는 거 아니야. 언니랑 상우 오빠가 어릴 때부터 약혼한 사이라는 건 알아. 그런데 지금 언니 평판이 이렇게 안 좋잖아. 계속 약혼을 유지하면 한씨 집안에서도 불만이 생길 거고, 심씨 집안 체면까지 같이 깎일 거야. 나 이렇게 하는 것도 심씨 집안을 위해서고, 다 잘되자고 하는 거야.”
  • 끝도 없이 늘어놓는 위선적인 말들이 역겨울 정도였다.
  • 심은하는 곧장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 “가식 떨면서 헛소리 그만해.”
  • “그리고 파혼할게.”
  • 짧고 깔끔한 대답에, 심채아의 흐름이 완전히 꼬여버렸다.
  • 심은하가 망설이지 않은 이유는, 노트에 적혀 있던 말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한상우는 위선자다.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라.
  • 한상우처럼 다정한 척하면서 뒤통수치는 남자라면, 갖고 싶은 사람이 가져가면 그만이었다.
  • 파혼은 해방이지, 절대 타협이 아니었다.
  • 심은하는 피가 흐르는 손을 늘어뜨린 채, 차갑고 담담한 얼굴로 서 있었다.
  • 아쉬움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 옆에 있던 심재민은 그런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 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는 두어 초 동안 말이 없었다.
  • 뭔가 이상했다.
  • 예전의 심은하는 한상우와 결혼하는 일을 인생의 집착처럼 여겼다.
  • 비굴할 정도로 맞춰주고, 한 걸음 한 걸음 물러서기만 했다.
  • 그런데 지금은 온몸이 엉망이고 손끝에서 피까지 흐르는데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약혼을 포기했다.
  • 완전히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 심재민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뒤에 선 경호원들에게 말했다.
  • “더는 밖에서 망신당하게 두지 마. 차에 태워. 정리 좀 시키고, 돌아가서 파혼 절차 밟는다.”
  • 심은하는 반항하지 않았다. 말도 하지 않았다.
  • 차 안 분위기는 숨이 막힐 만큼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심재민은 눈앞의 여동생을 바라보며, 속을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 “너 예전엔…… 이렇지 않았어.”
  • 심은하는 차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 눈빛은 텅 빈 것처럼 허공을 향해 있었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그녀는 예전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 비굴하고 가여웠던,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면 안전해질 수 있다고 믿던 자기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다.
  • 차는 심씨 집안 저택 앞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 거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부모의 고함이 얼굴을 때리듯 쏟아졌다.
  • 말끝마다 비난이 가득했다.
  • 이영희는 얼굴 가득 혐오를 드러냈다.
  • “넌 창피한 줄도 모르니? 당당한 심씨 집안 딸이라는 애가 작은 식당에 가서 일해? 밖에서 우리 심씨 집안을 얼마나 우습게 보겠어! 남들이 보면 우리 집이 망한 줄 알겠다!”
  • 심정훈의 얼굴은 시퍼렇게 굳어 있었다. 그는 역겨운 것을 보듯 심은하를 노려봤다.
  • “심씨 집안 체면을 네가 다 구겼어! 너는 정말 채아 발끝에도 못 미치는군!”
  • 예전이었다면, 심은하는 억울해하면서도 사과했을지도 몰랐다.
  • 하지만 지금은 그저 웃겼다.
  • “나를 집에서 쫓아낸 것도 당신들이고, 업계 전체에 나 못 일하게 막은 것도 당신들이잖아요. 밖에서 웃음거리 되게 만든 것도 당신들이고요.”
  • “당신들이 나를 막다른 길까지 몰아붙여서 먹고살려고 일하게 해놓고, 이제 와서 내가 창피하다고요?”
  • 그녀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심은하는 똑바로 쏘아붙였다.
  • “나, 정말 당신들 친딸 맞아요?”
  • 그 한마디가 이영희를 완전히 폭발시켰다.
  • 이영희는 순식간에 분노에 휩싸여 손을 들어 올렸고, 곧장 심은하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 짝,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강한 충격이 머릿속을 멍하게 만들었다.
  • 익숙한 끔찍한 통증이 순식간에 온몸을 덮쳤다.
  • “차라리 네가 내 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내가 그렇게 고생해서 반쯤 죽을 뻔하면서 낳은 게, 너 같은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이라니!”
  • 심은하의 머리는 충격을 견디지 못했다. 신경성 두통이 곧바로 터져 나왔다.
  • 눈앞이 까맣게 번쩍였고, 몸은 제멋대로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 뒤에서는 여전히 비난이 이어졌다. 시끄럽고 날카로워 귀를 찔렀다.
  • 심은하는 더는 한마디도 다투고 싶지 않았다.
  • 그녀는 이를 악물고 허리를 곧게 폈다.
  • 등 뒤에서 쏟아지는 욕설을 전부 무시한 채 방으로 들어가,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
  • 그녀는 두통과 손바닥의 찢어질 듯한 통증을 억지로 참으며, 품속에서 낡은 노트를 꺼냈다.
  • 떨리는 손으로 오늘 있었던 일을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 그녀는 펜을 꾹 눌러 잡고 한 글자 한 글자 선명하게 썼다.
  • 【내일 한상우와 파혼한다】.
  • 그 문장을 다 쓰고 나자, 며칠 동안 쌓이고 쌓인 억울함과 통증, 피로가 한꺼번에 그녀를 짓눌렀다.
  • 팽팽하게 버티고 있던 신경이 뚝 끊어지는 것 같더니, 의식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 심은하는 몸에서 힘이 풀린 채 그대로 침대 위로 고꾸라졌다.
  • 그리고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