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창수를 향해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는 온기라고는 단 한 점도 섞여 있지 않았다.
“룰은 간단해. 가장 높은 값을 부르는 사람이 가져가는 거야.”
나는 장내를 서늘하게 훑으며 선언했다.
“단, 한 번의 거래당 오직 한 사람의 자료만 영구 삭제한다. 자, 그럼 시작은 임창수 씨부터 가볼까?”
화면 속에서 임창수의 얼굴이 멈춰 섰다. 불룩하게 튀어나온 술배를 내밀고 주름이 자글자글해지도록 탐욕스럽게 웃고 있는 추한 모습이었다.
“임창수 씨, 방금 내 사촌 동생의 그 잘난 ‘첫날밤’을 사겠다고 3,000만 달러를 부르셨죠?”
나는 비릿하게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그럼 당신의 그 대단한 명예와 가정을 지키는 데는 얼마를 쓰실 건가요?”
임창수의 얼굴이 터질 듯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의 아내는 집안 배경이 쟁쟁하고 성격이 표독스럽기로 재계에서 유명했다. 이 사진이 그녀의 손에 들어가는 날엔, 그의 인생은 그날로 끝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쥐어짜듯 내뱉었다.
“……이건 명백한 협박이야!”
“맞아.”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담담히 인정했다.
“협박하는 거야.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덕분에 우리 집안의 그 지긋지긋한 사채 빚을 한 번에 털게 됐으니 미리 감사라도 드려야겠네. 어차피 이 돈, 전부 당신들이 자초한 일 아니야?”
시선을 돌려 무대 위에서 사색이 된 한유라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정신이 좀 드는지, 그녀가 나를 가리키며 비명을 질렀다.
“한수진! 너 미쳤어? 이러면 나만 죽는 게 아니라 너도 죽어! 집안 망신 다 시킬 셈이야?”
“망신?”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유라야, 이 사진들 전부 네가 기념으로 남겨야 한다며 나보고 찍어달라고 했던 것들이잖아. 네 성공의 전리품이라며 그렇게 으스대더니, 이제 와서 왜 이래?”
한유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렸다. 그래, 이 모든 기록은 내가 직접 남긴 것들이다. 지난 5년 동안 나는 그림자처럼 그녀를 수행했다. 때로는 비서로, 때로는 세상에 둘도 없는 절친으로 살며 그녀의 온갖 오물을 받아내는 쓰레기통으로 살았다.
유라는 영악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오로지 자신을 치장하는 데만 쏟아부었을 뿐, 단 한 번도 집안의 빚을 갚을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내가 제 말을 고분고분 듣는 멍청한 사촌 언니인 줄로만 알았겠지. 하지만 그녀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내 부모를 닦달해 자기 학비를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첫 고리대금을 떠안게 했던 그 비참했던 날부터, 내가 오직 오늘만을 위해 이 칼날을 갈아왔다는 것을.
“이…… 이 미친년이!”
한유라는 분에 못 이겨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비명을 지르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가볍게 몸을 비켜 공격을 피한 뒤,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부러뜨릴 듯 낚아챘다. 그리고 사색이 된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진정해, 유라야. 네 가치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무대 아래, 임창수는 짧은 고뇌 끝에 결심을 굳힌 듯했다. 잿빛으로 변한 얼굴을 경련하듯 떨며 그가 손을 번쩍 들었다.
“5,000만! 5,000만 달러면 되겠나!”
나는 가소롭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6,000만.”
“……알았어! 그렇게 하지!”
임창수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나는 무대 옆에 서 있던 도창수의 부하 중 하나를 가리켰다.
“거기, 카드 단말기 좀 가져와 봐.”
부하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나를 한 번, 안색이 잔뜩 굳은 도창수를 또 한 번 번갈아 보았다. 도창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결국 턱 끝으로 가볍게 신호를 보냈다. 내가 어디까지 가나 한 번 지켜보겠다는 속셈이리라.
입금 알람이 울렸다. 임창수의 돈 6,000만 달러가 정확히 꽂혔다. 나는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임창수의 이름이 적힌 폴더를 통째로 휴지통에 처넣고 ‘영구 삭제’ 키를 눌렀다. 그리고 화면을 넘겨 두 번째 사진 속 주인공, 강이현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강이현 씨, 이제 당신 차례야.”
강이현은 서른을 갓 넘긴 신흥 재벌이었다. 투자로 떼돈을 벌어들인 그는 아직 미혼이었고, 대외적인 평판과 이미지를 유난히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창백해진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그는 금테 안경을 고쳐 쓰며 태연한 척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수진 씨, 구구절절하게 굴지 말고 원하는 가격이나 말해요.”
“이현 씨, 역시 성격 시원시원하네.”
나는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노골적으로 훑어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당신은 아까 그 노인네보다 젊고, 미혼인 데다 앞날도 구만리잖아? 그만큼 흠집 하나 없는 깨끗한 이미지가 간절하겠지. 8,000만.”
강이현의 매끈한 입꼬리가 보기 흉하게 실룩였다. 장내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공포가 독액처럼 서서히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야 이 인간들도 깨달은 모양이다. 내가 그저 객기나 부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건 이 자리에 모인 거물들 모두를 겨냥해 설계된, 아주 정교하고 치밀한 사형 집행장이었다. 그리고 오늘 이 지옥 같은 판을 쥐고 흔드는 주인은, 바로 나였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끝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아예 무대를 향해 굴러떨어질 듯 몸을 내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수진아! 나 네 할머니다! 그 돈, 우리랑 반씩 나눠야 해!”
옆에 있던 셋째 삼촌도 질세라 악을 쓰며 거들었다.
“맞아! 근본도 모르는 계집애를 누가 키워줬는데! 당장 그 돈 내놔!”
역겨운 소음이 고막을 찔렀지만, 나는 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채 못 들은 척 시선을 거두었다. 내 눈동자는 여전히 강이현의 미간 사이에 고정되어 있었다.
“강이현 씨, 생각 끝났어? 이 사진이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 당신네 홍보팀이 밤새며 리스크 수습하는 데 드는 비용이 과연 8,000만 달러 선에서 끝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