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화내지 마. 나 진짜 언니 결혼 뺏으려는 거 아니야. 언니랑 상우 오빠가 어릴 때부터 약혼한 사이라는 건 알아. 그런데 지금 언니 평판이 이렇게 안 좋잖아. 계속 약혼을 유지하면 한씨 집안에서도 불만이 생길 거고, 심씨 집안 체면까지 같이 깎일 거야. 나 이렇게 하는 것도 심씨 집안을 위해서고, 다 잘되자고 하는 거야.”
끝도 없이 늘어놓는 위선적인 말들이 역겨울 정도였다.
심은하는 곧장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가식 떨면서 헛소리 그만해.”
“그리고 파혼할게.”
짧고 깔끔한 대답에, 심채아의 흐름이 완전히 꼬여버렸다.
심은하가 망설이지 않은 이유는, 노트에 적혀 있던 말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상우는 위선자다.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라.
한상우처럼 다정한 척하면서 뒤통수치는 남자라면, 갖고 싶은 사람이 가져가면 그만이었다.
파혼은 해방이지, 절대 타협이 아니었다.
심은하는 피가 흐르는 손을 늘어뜨린 채, 차갑고 담담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아쉬움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옆에 있던 심재민은 그런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는 두어 초 동안 말이 없었다.
뭔가 이상했다.
예전의 심은하는 한상우와 결혼하는 일을 인생의 집착처럼 여겼다.
비굴할 정도로 맞춰주고, 한 걸음 한 걸음 물러서기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온몸이 엉망이고 손끝에서 피까지 흐르는데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약혼을 포기했다.
완전히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심재민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뒤에 선 경호원들에게 말했다.
“더는 밖에서 망신당하게 두지 마. 차에 태워. 정리 좀 시키고, 돌아가서 파혼 절차 밟는다.”
심은하는 반항하지 않았다. 말도 하지 않았다.
차 안 분위기는 숨이 막힐 만큼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심재민은 눈앞의 여동생을 바라보며, 속을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예전엔…… 이렇지 않았어.”
심은하는 차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눈빛은 텅 빈 것처럼 허공을 향해 있었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예전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비굴하고 가여웠던,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면 안전해질 수 있다고 믿던 자기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다.
차는 심씨 집안 저택 앞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거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부모의 고함이 얼굴을 때리듯 쏟아졌다.
말끝마다 비난이 가득했다.
이영희는 얼굴 가득 혐오를 드러냈다.
“넌 창피한 줄도 모르니? 당당한 심씨 집안 딸이라는 애가 작은 식당에 가서 일해? 밖에서 우리 심씨 집안을 얼마나 우습게 보겠어! 남들이 보면 우리 집이 망한 줄 알겠다!”
심정훈의 얼굴은 시퍼렇게 굳어 있었다. 그는 역겨운 것을 보듯 심은하를 노려봤다.
“심씨 집안 체면을 네가 다 구겼어! 너는 정말 채아 발끝에도 못 미치는군!”
예전이었다면, 심은하는 억울해하면서도 사과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웃겼다.
“나를 집에서 쫓아낸 것도 당신들이고, 업계 전체에 나 못 일하게 막은 것도 당신들이잖아요. 밖에서 웃음거리 되게 만든 것도 당신들이고요.”
“당신들이 나를 막다른 길까지 몰아붙여서 먹고살려고 일하게 해놓고, 이제 와서 내가 창피하다고요?”
그녀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심은하는 똑바로 쏘아붙였다.
“나, 정말 당신들 친딸 맞아요?”
그 한마디가 이영희를 완전히 폭발시켰다.
이영희는 순식간에 분노에 휩싸여 손을 들어 올렸고, 곧장 심은하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짝,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강한 충격이 머릿속을 멍하게 만들었다.
익숙한 끔찍한 통증이 순식간에 온몸을 덮쳤다.
“차라리 네가 내 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내가 그렇게 고생해서 반쯤 죽을 뻔하면서 낳은 게, 너 같은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이라니!”
심은하의 머리는 충격을 견디지 못했다. 신경성 두통이 곧바로 터져 나왔다.
눈앞이 까맣게 번쩍였고, 몸은 제멋대로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여전히 비난이 이어졌다. 시끄럽고 날카로워 귀를 찔렀다.
심은하는 더는 한마디도 다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허리를 곧게 폈다.
등 뒤에서 쏟아지는 욕설을 전부 무시한 채 방으로 들어가,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
그녀는 두통과 손바닥의 찢어질 듯한 통증을 억지로 참으며, 품속에서 낡은 노트를 꺼냈다.
떨리는 손으로 오늘 있었던 일을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 그녀는 펜을 꾹 눌러 잡고 한 글자 한 글자 선명하게 썼다.
【내일 한상우와 파혼한다】.
그 문장을 다 쓰고 나자, 며칠 동안 쌓이고 쌓인 억울함과 통증, 피로가 한꺼번에 그녀를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