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고서야 사랑받기 시작했다
Rick-one
Last update: 1970-01-01
제1화
- 심은하는 아파서 눈을 떴다.
- 정신이 들었을 때, 그녀는 경호원들에게 붙들린 채 차가운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 무릎에서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 눈앞의 여자아이는 가엾게 울며 한 중년 여자의 품에 기대 있었다.
-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 그 아이는 제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 손가락에는 두툼한 거즈가 칭칭 감겨 있었다.
- 심채아가 심은하를 향해 울먹이며 말했다.
- “언니…… 내가 엄마 아빠한테 언니가 내 디자인 베꼈다고 말한 건 잘못했어.”
- “그런데 그렇다고 내 손가락을 꺾을 줄은... 언니, 왜 그랬어?”
- 디자인을 베꼈다니.
- 손가락을 꺾었다니.
- 심은하는 머리가 깨질 듯 어지러웠다.
-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 이영희는 가슴이 찢어지는 얼굴로 심채아를 끌어안았다.
-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심은하를 노려보았다.
- 그 눈빛은 꼭 사람을 문 미친개를 보는 것 같았다.
- “아무리 그래도 채아는 네 친동생이야. 어떻게 이렇게까지 모질게 굴 수가 있어!”
- 하지만 심은하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심채아를 다치게 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 “저는 안…….”
- 막 해명하려던 순간, 아버지 심정훈의 손바닥이 그녀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 안 그래도 어지럽던 머리에 찢어질 듯한 통증이 번졌다.
- 심은하는 그대로 눈앞이 캄캄해지며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 피가 입가에서 배어나와 바닥 위로 뚝뚝 떨어졌다.
- 오빠 심재민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혀를 찼다.
- “아직도 인정 안 해? 그럼 계속 가둬 둬. 먹을 것도 물도 주지 말고, 똑똑히 반성하게 만들어.”
- 말이 끝나자마자 경호원들이 심은하를 질질 끌고 가 지하실에 내던졌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 심은하는 겨우 희미하게 정신을 되찾았다.
- 지하실의 축축하고 차가운 냉기가 옷자락을 타고 스며들어 뼈마디 사이까지 파고들었다.
- 그녀는 벽을 짚고 몇 번이나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 한참을 버둥거린 끝에야 겨우 벽에 기대 앉을 수 있었다.
- 심은하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 속 수첩을 꺼냈다.
- 수첩을 펼쳐 확인하는 일은 이미 그녀의 본능이 되어 있었다.
- 기억나지 않는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수첩부터 펼쳤다.
- 반년 전, 심은하는 복합성 정신 질환 진단을 받았다.
- 그중 가장 심각한 증상은 간헐적 기억상실이었다.
- 증상은 아무 예고 없이 찾아왔고, 심한 정도도 그녀가 전혀 조절할 수 없었다.
- 상태가 안정적일 때는 일주일 안의 자잘한 일들까지 기억할 수 있었다.
- 하지만 증상이 심해지면, 바로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완전히 잊어버렸다.
- 그래서 그녀는 매일 자신이 기억하는 일들을 전부 적어 둘 수밖에 없었다.
- 어제 날짜의 글씨는 유난히 꾹꾹 눌러 쓰여 있었다. 그때 머리가 꽤 심하게 아팠던 모양이었다.
- 수첩에는 분명히 적혀 있었다.
- 어젯밤, 부모가 시킨 집안일을 모두 끝낸 뒤 심채아의 옷 열몇 벌을 손빨래해 주고, 그대로 방으로 돌아갔다고.
- 그녀는 밤새 방문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 심채아를 찾아가 싸우고 손찌검할 일 따위, 애초에 가능할 리가 없었다.
- 심은하는 수첩 앞쪽의 내용들을 하나하나 넘겨 보았다.
- 읽으면 읽을수록 심장이 쥐어짜이는 것처럼 아팠다.
- 알고 보니, 이번처럼 억울하게 뒤집어쓴 일이 벌써 아흔아홉 번째였다.
- ——
- 심성그룹은 이름난 재벌 그룹이었다.
- 심 씨 집안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원래라면 평범한 사람은 평생 꿈도 꾸지 못할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 유명 기업가인 아버지 심정훈.
- 다정하고 지적인 어머니 이영희.
- 그리고 자신을 아껴 주던 오빠 심재민.
- 하지만 모든 것이 15년 전, 산산조각 났다.
- 그날, 그녀는 여동생 심채아를 데리고 쇼핑을 하러 나갔다.
- 그런데 심채아는 납치되어 사라졌고, 심은하만 멀쩡히 집으로 돌아왔다.
- 가족들은 몇 달 동안 사방을 뒤졌지만, 아무런 소식도 찾지 못했다.
- 이영희는 슬픔에 무너져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 아버지는 말수가 줄었고, 감정 기복이 심해졌다.
- 한때 그녀를 가장 사랑해 주던 오빠마저도 늘 그녀를 욕하고 원망했다.
- 그날 이후, 집안에서 아무도 심은하에게 제대로 말을 걸어 주지 않았다.
- 한없이 사랑받던 재벌집 맏딸은 순식간에 모두에게 손가락질받는 죄인이 되어 버렸다.
- 집안의 고용인들조차 그녀를 함부로 대했다. 가족들은 언제나 못 본 척했다.
- 그러던 3년 전.
- 실종됐던 심채아가 갑자기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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