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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 강태준은 뒤늦게 고개를 든 후회에 잠식되고 있었다.
  • 새벽녘, 꿈속에서 이연우를 보았다. 그녀는 병이라도 든 듯 안색이 파리했고, 아름답던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고 있었다. 꿈속의 자신이 그 옆에서 처절하게 울고 있을 때, 웬 남자가 나타나 그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챘다.
  • “연우를 어떻게 돌본 거야! 평생 지켜주겠다고, 네 목숨보다 아끼겠다고 맹세했잖아!”
  • 번쩍 눈을 떴을 때, 강태준은 자신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맺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조건반사처럼 휴대폰을 열어 이연우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다 멈칫했다. 화면의 빛이 얼굴을 비추는 순간, 지독한 현실이 그를 때렸다. 그들은 이미 남남이었다.
  • 하지만 그는 단 한번도 진심으로 이혼을 원한 적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이연우를 사랑했고, 예전처럼 그녀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고 믿었다.
  • 대체 언제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걸까.
  • 아마 지훈이를 가문에 빼앗긴 뒤부터였을 것이다. 아이를 되찾아오겠다며 이연우는 점점 예전의 생기를 잃어갔다. 그녀의 시선은 더 이상 강태준을 향하지 않았고, 그저 다른 따분한 재벌가 사모님들과 똑같이 감정이 거세된 사람처럼 변해버렸다.
  • 아니, 그때도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곧 두 번째 아이도 찾아왔으니까. 하지만 그 아이는 몸이 약해 채 태어나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 그때 이연우는 무너진 채 소리쳤다. 당신이 증오스럽다고. 강태준은 그저 그녀가 홧김에 하는 소리라고 치부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줄 알았다.
  • 그런 강태준에게 서이수는 끊임없이 독을 주입했다. 이연우가 정말 당신을 증오하고 있다고. 당신을 탓하지 않는 건, 이미 당신을 버리고 떠날 준비를 마쳤기 때문이라고.
  •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연우는 서이수의 말처럼 점점 차가워졌고, 예전의 열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화가 났다. 그녀가 서이수를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자신을 유혹하는 서이수를 밀어내지 않았다.
  • 서이수를 이용해 이연우를 자극하고 싶었다. 그녀가 질투하며 다시 제 곁으로 돌아오길 바랐다. 하지만 기다리던 반응은 오지 않았다. 이연우는 매일같이 사모님들과 어울리며 그를 철저히 타인처럼 대했다.
  • 어떻게 관계를 회복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그때, 서이수가 약을 썼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서이수와 선을 넘은 뒤였다. 서이수는 책임을 지라고 했지만, 강태준이 사랑하는 건 오직 이연우뿐이었다.
  • 다만, 이연우를 어떻게 사랑했었는지 그 느낌을 잊어버렸을 뿐이다. 뜨겁고 솔직한 서이수와 차갑고 날카로운 이연우. 남자라면 누구를 택할지 뻔해 보였다.
  • 하지만 강태준은 결코 서이수를 사랑하지 않았다.
  • 날카로운 벨 소리가 끈질기게 따라붙던 깨뜨렸다.
  • “대표님, 오늘 저녁 8시에 컨퍼런스 회의가 있습니다. 계약서는 검토하시기 편하게 메일로 발송해 드렸습니다.”
  • “전에는 다 정리해서 요약본으로 가져오지 않았나? 오늘 왜 이래, 다들”
  • 강태준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복잡한 계약 조항을 일일이 대조하는 귀찮은 일은 늘 누군가 완벽하게 끝내놓던 일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비서가 당혹스러운 듯 대답했다.
  • “……전에는 사모님께서 전부 검토하시고, 독소 조항까지 체크해서 확정해 주셨습니다. 저희는 사모님 컨펌 없이는 진행한 적이 없어서요.”
  •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번 파트너는 업계에서도 혀를 내두를 만큼 까다로운 자들이었다. 이연우가 뒤에서 어떤 로비를 하고 어떤 공을 들였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그녀가 깎아 먹은 수명으로 얻어낸 단 한 번의 기회였다.
  • 서이수는 기어코 이 자리에 따라오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태준은 그녀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저 꽃병처럼 조용히 자리만 지키다 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수는 지나치게 들떠 있었고, 결정적으로 무식했다.
  • 그녀는 협력사 대표의 옷에 묻은 와인 자국을 닦아주겠다며 직접 손을 댔고, 대표의 부인이 싸늘한 눈초리로 제지하는데도 눈치 없이 교태를 부리며 콧소리를 냈다. 순식간에 분장내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협력사 대표는 오물이 묻은 손길을 털어내듯 계약 거부 의사를 밝혔다.
  • “원래는 이연우 사모님의 안목을 믿고 진행하려던 계약이었는데, 파트너의 수준이 이렇게 천박해서야 어디 불안해서 같이 하겠습니까?.”
  • 협력사 대표의 부인은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고개를 까딱이며 서이수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마치 못 볼 오물을 본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입술이 비틀리며 서늘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 “강 대표님, 옆에 세워둔 이 근본 없는 건 뭡니까? 비서라기엔 애사심이 아니라 ‘사심’이 넘쳐 보이고, 아내라기엔…… 글쎄요, 우리 모임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저급한 취향이라.”
  • 노골적인 무시에 서이수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부인은 서이수가 임신해서 부풀어 오른 배를 혐오스럽다는 듯 쳐다보더니, 강태준을 향해 쐐기를 박았다.
  • “그 배부른 몸으로 남의 남편 가슴팍 훔치러 나온 게 비서라면 참 눈물겹네요. 하지만 만약 강 대표님이 새로 들인 ‘그거’라면, 수준이 너무 떨어져서 더는 대화를 섞고 싶지 않군요.”
  • 부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태준의 안색을 난도질했다. 주변 재벌가 인사들의 비웃음 섞인 수군거림이 가시가 되어 귓가를 찔렀다.
  • “원래는 이연우사모님의 안목을 믿고 진행하려던 계약이었는데, 파트너의 수준이 이렇게 천박해서야 어디 불안해서 같이 하겠습니까?”
  • 강태준은 이 계약이 엎어지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비굴할 정도로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 “아닙니다, 오해입니다! 이쪽은 그저 충성심이 지나친 비서일 뿐입니다. 조만간 제 아내, 연우를 데리고 다시 정식으로 사과드리러 가겠습니다!”
  • “아내요? 아, 그 현명한 분을 아직 아내라고 부를 염치는 있으신 모양이네요.”
  • 부인은 콧방귀를 뀌며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태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서이수의 손목을 비틀어 잡으려 고개를 돌렸지만, 사고를 친 그녀는 이미 꼬리를 내리고 인파 속으로 숨어버린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