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움찔하며 고개를 들더니, 이내 겁먹은 듯 다시 시선을 떨구었다. “아버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더 듣지 않고 허리를 숙여 지훈이를 품 안 가득 껴안았다. 이 작은 몸을 다시 안아보기까지 6년이라는 세이 필요했다.
“지훈아, 엄마한테는 지난 2,293일이 지옥이었어. 너를 한 번도 잊지 못해서, 하루하루가 너무 길었거든.”
한참 동안 내 품에서 뻣뻣하게 굳어 있던아이가 작게 “네” 하고 대답했다. 곧이어 내 어깨 위로 뜨겁고 축축한 물기가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들뜬 마음으로 지훈이의 방을 보여주었다. 네가 없는 동안 너를 그리워하며 하나둘 사 모았던 장난감과 새 옷들을 하나하나 몸에 대보며 설명했다. 지훈이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얼굴이 발그레해진 아이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더니, 내 시선 앞에서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정말 마음에 들어요.”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얼어붙었다.
“지훈아, 난 네 엄마야. 엄마한테 이렇게 깍듯하게 굴지 않아도 돼. 네가 어떤 모습이든 엄마는 널 사랑해.”
지훈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아이가 가리킨 곳에는 보슬보슬한 홈웨어가 있었다. 나와 세트로 맞춰 입는 '패밀리 룩'이었다.
“지훈아, 앞으로 엄마라고 불러줘. 그럼 엄마가 지훈이 소원은 뭐든 다 들어줄게.”
식사 시간의 지훈이는 지나치게 얌전했다. 일곱 살 아이답지 않게 숨소리조차 죽이며 수저를 움직였다. 아이가 세 번째로 당근에 젓가락을 가져다 댔을 때,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지훈아, 싫어하면 안 먹어도 돼.”
당근을 볼 때마다 아이의 눈빛은 비장하리만큼 무거워졌지만, 누군가의 눈치를 보듯 억지로 입안에 밀어 넣고 있었다. 지훈이의 손이 덜덜 떨렸다. 조건반사처럼 아이가 대답했다.
“싫어하지 않아요.남기면 안 된다고 하셔서…….”
그러다 나를 보고 나서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은 듯 멍해졌다. “……엄마.”
나는 아이의 식판에서 당근을 골라냈다.
“엄마는 지훈이가 편식하는 거도 좋아해. 너에겐 싫은 걸 싫다고 말할 권리가 있어.”
지훈이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동안 “완벽한 후계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기호도, 감정도 죽여야 했던 아이에게 처음으로 허락된 자유였다. 아이는 식판 위의 소고기를 내 쪽으로 조심스레 밀어주었다.
“엄마, 너무 말랐어요. 엄마가 드세요.”
아이의 마음이 기특해 고기를 입에 넣었지만, 그와 동시에 격한 구역질이 전신을 휘감았다.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해냈다. 변기를 붙잡고 위액까지 쏟아내다 문득 지훈이가 생각났다. 아이는 내 뒤에 겁에 질린 채 울고 있었다.
“괜찮아, 지훈아. 엄마가 요즘 몸이 좀 약해져서 그래.”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서둘러 물을 내렸다. 사물과 뒤섞여 내려가는 선혈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훈이와 만난 지 열흘째 되는 날, 우리는 놀이공원에 갔다. 오전에 항암 치료를 받고 오느라 조금 늦어진 탓에 마음이 급했다. 사람들에섞여 줄을 서 있던 중, 저 멀리서 강태준과 서이수가 보였다. 그들은 커플 머리띠를 쓴 채 남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지훈이도 그 광경을 보았다. 아이는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엄마, 저 좀 피곤해요. 뭐 좀 먹으러 가요.”
아이를 손을 잡고 식당으로 향했지만, 악연은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음식을 주문하는 사이, 서이수가 지훈이에게 다가가 무언가 속삭이는 것을 보았다. 나는 급히 달려가 그녀를 팔목을 낚아채 밖으로 끌고 나갔다.
“강태준이랑 뭘 하든 상관 안 해. 하지만 내 아들 앞엔 나타나지 마!”
내 경고에도 서이수는 비릿한 냉소를 흘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왜 이래? 어차피 나중에 새엄마로 마주할 사이인데 미리 인사 좀 한 거지. 그런데 연우야, 너 저 애가 평범한 애인 줄 알지? 쟤, 제정신 아니야. 너도 봤을 거 아냐. 지훈이 오른손 새끼손가락 한 마디 없는 거”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훈이가 우리 집에 온 첫날 밤, 씻을 때부터 아이는 이상하리만큼 오른손을 숨기며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아이가 겨우 잠든 뒤 몰래 확인했을 때, 내 심장을 난도질했던, 그 광경. 지순이의 새끼손가락 끝마디는 정말로 무참히 잘려 나가 있었다.
“얼마 전에 길고양이를 한 마리 몰래 데려왔더라고. 짐승 따위를 들였냐고 추궁당하는데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떼니까, 강 회장님이 격노해서 그 자리에서 날려버리셨지. 자기 행동에 책임도 못 질 거면 멍청한 짓 하지 말라는 경고라나 뭐라나!”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분노로 사정없이 떨려왔다. 이제 고작 일곱 살이다. 그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인간 탈을 쓰고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서이수는 즐겁게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근데 네 아들이 그 뒤에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미친놈처럼 소동을 피워서 강 회장님을 아주 까무러치게 만들었어. 연우야, 네 아들 비정상이라니까? 사고 더 치기 전에 당장 정신병원에나 처넣어…….”
지훈이가 그럴 리 없다. 설령 그랬다 해도 아이를 그렇게 몰아넣은 건 너희들이다. 나는 참지 못하고 서이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찰싹!
고개가 돌아간 그녀의 턱을 거칠게 틀어쥐고, 나는 짐승 같은 소리를 짓눌러 내뱉으며 경고했다.
“한 번만 더 내 아들 상처 들쑤시며 그따위 입 지껄여봐. 그땐 강태준이고 가문이고, 내 손으로 직접 네 숨통을 끊어놓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