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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 아이는 움찔하며 고개를 들더니, 이내 겁먹은 듯 다시 시선을 떨구었다. “아버님이 말씀하시기를…….”
  • 나는 더 듣지 않고 허리를 숙여 지훈이를 품 안 가득 껴안았다. 이 작은 몸을 다시 안아보기까지 6년이라는 세이 필요했다.
  • “지훈아, 엄마한테는 지난 2,293일이 지옥이었어. 너를 한 번도 잊지 못해서, 하루하루가 너무 길었거든.”
  • 한참 동안 내 품에서 뻣뻣하게 굳어 있던아이가 작게 “네” 하고 대답했다. 곧이어 내 어깨 위로 뜨겁고 축축한 물기가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 집으로 돌아온 나는 들뜬 마음으로 지훈이의 방을 보여주었다. 네가 없는 동안 너를 그리워하며 하나둘 사 모았던 장난감과 새 옷들을 하나하나 몸에 대보며 설명했다. 지훈이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얼굴이 발그레해진 아이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더니, 내 시선 앞에서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 “감사합니다, 어머니. 정말 마음에 들어요.”
  •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얼어붙었다.
  • “지훈아, 난 네 엄마야. 엄마한테 이렇게 깍듯하게 굴지 않아도 돼. 네가 어떤 모습이든 엄마는 널 사랑해.”
  • 지훈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아이가 가리킨 곳에는 보슬보슬한 홈웨어가 있었다. 나와 세트로 맞춰 입는 '패밀리 룩'이었다.
  • “지훈아, 앞으로 엄마라고 불러줘. 그럼 엄마가 지훈이 소원은 뭐든 다 들어줄게.”
  • 식사 시간의 지훈이는 지나치게 얌전했다. 일곱 살 아이답지 않게 숨소리조차 죽이며 수저를 움직였다. 아이가 세 번째로 당근에 젓가락을 가져다 댔을 때,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 “지훈아, 싫어하면 안 먹어도 돼.”
  • 당근을 볼 때마다 아이의 눈빛은 비장하리만큼 무거워졌지만, 누군가의 눈치를 보듯 억지로 입안에 밀어 넣고 있었다. 지훈이의 손이 덜덜 떨렸다. 조건반사처럼 아이가 대답했다.
  • “싫어하지 않아요.남기면 안 된다고 하셔서…….”
  • 그러다 나를 보고 나서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은 듯 멍해졌다. “……엄마.”
  • 나는 아이의 식판에서 당근을 골라냈다.
  • “엄마는 지훈이가 편식하는 거도 좋아해. 너에겐 싫은 걸 싫다고 말할 권리가 있어.”
  • 지훈이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동안 “완벽한 후계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기호도, 감정도 죽여야 했던 아이에게 처음으로 허락된 자유였다. 아이는 식판 위의 소고기를 내 쪽으로 조심스레 밀어주었다.
  • “엄마, 너무 말랐어요. 엄마가 드세요.”
  • 아이의 마음이 기특해 고기를 입에 넣었지만, 그와 동시에 격한 구역질이 전신을 휘감았다.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해냈다. 변기를 붙잡고 위액까지 쏟아내다 문득 지훈이가 생각났다. 아이는 내 뒤에 겁에 질린 채 울고 있었다.
  • “괜찮아, 지훈아. 엄마가 요즘 몸이 좀 약해져서 그래.”
  •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서둘러 물을 내렸다. 사물과 뒤섞여 내려가는 선혈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지훈이와 만난 지 열흘째 되는 날, 우리는 놀이공원에 갔다. 오전에 항암 치료를 받고 오느라 조금 늦어진 탓에 마음이 급했다. 사람들에섞여 줄을 서 있던 중, 저 멀리서 강태준과 서이수가 보였다. 그들은 커플 머리띠를 쓴 채 남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지훈이도 그 광경을 보았다. 아이는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 “엄마, 저 좀 피곤해요. 뭐 좀 먹으러 가요.”
  • 아이를 손을 잡고 식당으로 향했지만, 악연은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음식을 주문하는 사이, 서이수가 지훈이에게 다가가 무언가 속삭이는 것을 보았다. 나는 급히 달려가 그녀를 팔목을 낚아채 밖으로 끌고 나갔다.
  • “강태준이랑 뭘 하든 상관 안 해. 하지만 내 아들 앞엔 나타나지 마!”
  • 내 경고에도 서이수는 비릿한 냉소를 흘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 “왜 이래? 어차피 나중에 새엄마로 마주할 사이인데 미리 인사 좀 한 거지. 그런데 연우야, 너 저 애가 평범한 애인 줄 알지? 쟤, 제정신 아니야. 너도 봤을 거 아냐. 지훈이 오른손 새끼손가락 한 마디 없는 거”
  •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 지훈이가 우리 집에 온 첫날 밤, 씻을 때부터 아이는 이상하리만큼 오른손을 숨기며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아이가 겨우 잠든 뒤 몰래 확인했을 때, 내 심장을 난도질했던, 그 광경. 지순이의 새끼손가락 끝마디는 정말로 무참히 잘려 나가 있었다.
  • “얼마 전에 길고양이를 한 마리 몰래 데려왔더라고. 짐승 따위를 들였냐고 추궁당하는데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떼니까, 강 회장님이 격노해서 그 자리에서 날려버리셨지. 자기 행동에 책임도 못 질 거면 멍청한 짓 하지 말라는 경고라나 뭐라나!”
  •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분노로 사정없이 떨려왔다. 이제 고작 일곱 살이다. 그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인간 탈을 쓰고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하지만 서이수는 즐겁게 말을 멈추지 않았다.
  • “근데 네 아들이 그 뒤에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미친놈처럼 소동을 피워서 강 회장님을 아주 까무러치게 만들었어. 연우야, 네 아들 비정상이라니까? 사고 더 치기 전에 당장 정신병원에나 처넣어…….”
  • 지훈이가 그럴 리 없다. 설령 그랬다 해도 아이를 그렇게 몰아넣은 건 너희들이다. 나는 참지 못하고 서이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 찰싹!
  • 고개가 돌아간 그녀의 턱을 거칠게 틀어쥐고, 나는 짐승 같은 소리를 짓눌러 내뱉으며 경고했다.
  • “한 번만 더 내 아들 상처 들쑤시며 그따위 입 지껄여봐. 그땐 강태준이고 가문이고, 내 손으로 직접 네 숨통을 끊어놓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