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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 타투를 지우기로 결심하자 타투이스트가 분주히 움직였다.
  • 피부를 파고드는 레이저가 열감이 어깨뼈를 타고 번졌다. 살을 지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나는 신음 한 번 내뱉지 않았다. 이깟 통증쯤이야 가슴에 박힌 대못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 작업이 끝나고 창백해진 얼굴로 부축을 받으며 일어서는데, 휴대폰이 진동했다. 강태준이었다.
  •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병원으로 나를 찾아왔던 걸까, 아니면 서이수가 들고 있던 내 암 진단서를 이제야 본 걸까. 아주 찰나였지만,가느다란 희망이 올가미처럼 목을 죄어왔다.
  • 전화를 받자마자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상수화기 너머에서 차가운 음성이 날아와 박혔다.
  • “이연우, 이혼해.”
  • 기대했던 사과도, 걱정도 없었다. 그는 내 대답 따위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 무미건조하게 말만 이어갔다.
  • “KH ㄱ룹의 자산을 네가 나누기엔 무리가 있겠지만, 네 몫으로 최대한 챙겨는 줄게. 지훈이 문제는 걱정하지 마. 우리 집 후계자로 부족함 없이 자랄 테니까.”
  • 고요한 숨소리만 들려오는 수화기를 붙잡고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수많은 말을 삼키코,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단 하나뿐이었다.
  • “........알았어.”
  • “언제쯤 집에 와서 서류에 도장 찍을 수 있지?”
  • 그가 재촉하듯 물었다. 단 한순간도 나와 엮이기 싫다는 듯한 그 조급함이 비수로 돌아와 꽂혔다.
  • “내일.”
  • 오늘은 안 된다. 휴대폰에 뜬 병원 예약 메시지를 보았다. 오늘은 내 몸속에 퍼진 암세포와 싸우기 위해, 항암 치료를 시작해야 하는 날이었으니까.
  • 집으로 돌아가니 강태준과 서이수가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마치 사냥감을 기다리는 포식자들처럼, 꽤 오래 기다린 기색이었다.
  • 테이블 위에는 이미 완벽하게 준비된 이혼 서류가 놓여 있었고, 그들 뒤에 선 변호사는 당장이라도 숨통을 끊어 놓겠다는 듯노트북과 휴대용 프린터까지 챙겨온 상태였다.
  • 내가 두툼한 코트로 몸을 꽁꽁 싸매고 들어서자, 강태준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 “옷차림이 그게 뭐야? 그동안 KH 그룹에서 배운 예법은 다 어디로 팔아먹었지? 역시 근본 없는 건 못 속이는군.”
  • 그의 시선이 내게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불안함을 느낀 서이수가 얼른 그의 팔을 다독이며 나를 쏘아붙였다.
  • “자, 봐봐. 마음에 안 드는 조항 있으면 당장 말해. 바로 수정해 줄 테니까.”
  • 변호사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사무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이연우 씨, 결혼 당시 본인이 직접 지분 분할을 거부하셨기에 현재 그룹 내에서 드릴 주식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간의 헌신을 고려해 강태준 대표님께서 현금 200억을 지급하기로 하셨습니다. 추가로 원하시는 지역의 상가와 주택을 열 채까지 증여해 드릴 예정입니다.”
  • 나를 떼어내려고 강태준이 아주 큰마음을 먹은 모양이다.하지만 나는 그들의 오만함을 비웃어주기로 했다.
  • “100억 더 추가해.”
  • 강태준은 내 탐욕이 오히려 반갑다는 대답했다.
  • “좋아.”
  • 그러자 서이수가 얼굴을 붉히며 비명을 질렀다.
  • “좋긴 뭐가 좋아! 야, 이연우, 너 태준 오빠 아니었으면 평생 1억도 못 만져봤을 주제에 지금 누굴 갈취하려고 들어.”
  • 뒤틀린 서이수의 얼굴을 보며 나는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띄웠다.
  • “300억.”
  • “안 돼! 태준 오빠, 오빠가 말 좀 해봐요!이건 말도 안 된다고!”
  • 강태준도 눈동자도 이번엔 가늘게 떨렸다. 아무리 재벌이라 해도 개인적으로 즉시 융통할 수 있는 현금 자산 중 300억은 그의 재산 절반을 털어내는 셈이었으니까. 나는 쐐기를 박듯 마지막 요구를 던졌다.
  • “현금 100억으로 깎아줄게. 대신 지훈이를 두 달 동안 내가 데리고 있게 해줘. 안 그러면 이혼 서류에 도장 찍을 생각 없으니까. “
  • “……알았어. 가문을 설득해서라도 방법을 찾지.”
  • 나는 수정된 이혼 합의서에 망설임 없이 사인을 갈겼다.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 “이제 내 집에서 나가줘.이 신혼집, 위자료에 포함된 거 변호사한테 확인했지?”
  • 분노를 참지 못한 서이수가 내 머리채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가락이 머리카락에 닿는 순간, 그녀는 힘없이 벗겨진 무언가와 함께 바닥으로 처참하게 고꾸라졌다.
  • “너…… 너 머리가 왜 이래? 왜 가발을 쓰고 있어?!”
  • 강태준은 가발이 벗겨진 나의 매끈하고 휑한 머리를 보더니,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왔다. 나는 그의 손을 싸늘하게 쳐냈다.
  • “과거랑 깨끗이 끝내고 싶어서 싹 밀었어. 당신이라는 오물을 씻어내려면 이 정도 결단력은 있어야지, 안 그래?”
  • 결국 서이수는 기겁하며 강태준을 끌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지독하게 화려하기만 한 이 집도 이제 미련 없었다.
  • 며칠 뒤, 나는 약속대로 카페에서 지훈이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를 본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추운 겨울날, 아이는 관리하는 사람 하나 없이 얇은 옷 한 벌만 걸친 채 떨며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