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7화

  •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다시 차가운 병실 안이었다. 지훈이는 침대맡에 머리를 기댄 채 밭을 숨을 내쉬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
  • 의사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잠든 아이를 의식한 듯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상태가…… 역시나 악화되었습니다.”
  • 묻고 싶었다. 매일같이 항암 치료를 고통을 견뎐는데, 누구보다 살고 싶어서 기를 쓰고 버텼는데 왜 나빠지기만 하느냐고. 하지만 입술만 달싹일 뿐, 차마 질문이 되지 못한 말들이 목구멍에 걸렸다.
  • 대화 소리에 깬 지훈이가 내 손을 꼭 쥐어 왔다. 나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가 한참 뒤에야 조용히 입을 뗐다. “선생님, 이제…… 의미 없는 치료는 그만할게요.”
  • 나는 지훈이에게 단순한 빈혈일 뿐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엄마가 자란 고향 동네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지훈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내가 태어난 작은 산골 마을로 향했다.
  • 세상에 남은 혈육은 이제 없었다. 나에겐 지훈이뿐이었고, 지훈이에게도 온전한 내 편은 나 하나였다. 익숙한 시골길을 걷고 있자니, 독한 약기운에 짓눌러 있던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착각이 들었다.
  • 그때 뒤에서 망설임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우…… 이연우니?”
  • 나는 멈칫하며 뒤를 돌아봤다. 기억 속의 얼굴이 눈앞에 겹쳐졌다. “윤호야!”
  • 서윤호는 나보다 더 감격한 듯 눈을 반짝이며 달려왔다. “세상에, 날 기억해 주다니!정말 오랜만이다.”
  • “당연히 기억하지.”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너 학교 다닐 때 수업 빼먹는 거 전문이었잖아. 근데…… 나를 한눈에 알아볼 줄은 몰랐네.”
  • 서윤호가 정말 의아한 듯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예전이랑 똑같이 예쁜데. 넌 하나도 안 변했어, 이연우.”
  • 예전이랑 똑같다고? 가발을 쓰고, 안색을 회장으로 가린 채 죽어가는 나인데. 나는 아는 사람의 눈에는 내가 여전히 빛나던 시절 그대로인 걸까. 서윤호의 시선이 지훈이에게 머물렀고, 지훈이도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 “와, 너랑 정말 많이 닮았다. 곧 점심시간인데 우리 집에 가서 밥 먹고 갈래? 할머님도 널 자주 찾으셨어.”
  • 나는 조욯히 고개를 저었다. 죽음을 앞둔 이의 그림자가 온기 넘치는 남의 집을 더렵히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저 지훈이를 데리고 마을 구석구석을 누비며 미친 듯이 놀아주었다. 아이의 입가에 웃음이 번질수록 내 마음은 갈가리 찢겨 나갔다.
  • 약속했던 두 달의 기한이 끝나가고 있었다. 내 몸도 이제 한계를 넘어서 있다는건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거울 앞에 서서 휑하게 패인 눈동자와 뼈만 남은 몰골이 비쳤다. 외면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마주해야 할 순간이었다.
  • 나는 지훈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다시 그 차가운 강 회장의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냐고. 지훈이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 “엄마랑 같이 있을래요! 거기 사람들은 다 나보고 엄마 없는 애라고 한단 말이에요!”
  • 아이의 눈에 차오르는 눈물을 보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내가 조금만 더 독해졌더라면, 지훈이는 내 곁에서 평버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었을 텐데.
  • “지훈아, 지훈이를 사랑해 줄 어른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어. 엄마한테 정말 좋은 친구가 있는데, 아마 엄마보다 더 널 예뻐해 줄 거야. 그 예린 이모랑 같이 있으면 지훈이는 매일매일 선물 같을 거야.”
  • 지훈이는 갑자기 입을 꾹 다물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떨리는 다리를 지탱하며
  • 아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영특한 지훈이는 이미알고 있었을 것이다. 엄마의 몸속에 괴물이 자라고 있다는 걸. 도서관에 갈 때마다 고작 일곱 살인 아이가 암에 관한 서적들을 찾아내 한 글자씩 짚어가며 읽어내겨가던 그 가냘픈 뒷모습이 떠올랐다.
  • “엄마가 조금 많이 아파서, 아주 먼 곳으로 치료받으러 가야 해. 의사 선생님이 치료할 때는 어린애는 옆에 있으면 안 된대. 엄마 병 다 나으면, 그때 지훈이 찾으러 꼭 갈게”
  • 차마 '죽음'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못한 채, 나는 가장 잔인한 거짓말을 아이의 가슴에 박았다. 결국 지훈이는 내 친구와 함께 떠나기로 했다. 연락을 받은 차예린이 해외에서 밤 비행기를 타고 단숨에 날아왔다. 송장처럼 변해버린 내 몰골을 본 예린은 주저앉아 오열했다.
  • 나는 무감각한 손으로 준비해둔 서류 뭉치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동안 내 수명을 깎아가며 조사해온 KH 그룹 강 씨 일가의 모든 추악한 치부들이었다.
  • “그 인간들이 지훈이를 순순히 포기하진 않겠지만, 이 자료들이 비수가 되어 그들의 목을 겨누면 얘기가 달라질 거야.”
  • KH 그룹의 치명적인 기밀, 그리고 강 회장이 지훈이에게 저지른 잔혹한 아동 학대의 증거들. 그들이 지훈이를 ‘후계자 카드’를 포기하고 입을 닥치게 만들기에 충분한 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