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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피로 새겨진 계약

  • “죽어.”
  • 소희는 펜을 들었다. 손이 너무 떨려서 몇 번이나 실패했다. 겨우 이름을 썼다.
  • 승혁이 종이를 거두더니 방을 나갔다. 소희는 혼자 남았다. 시트 위의 핏자국이 빨갛게 번지고 있었다.
  • 잠시 후, 문이 다시 열렸다. 진우였다.
  • “나…… 죽는 거야?”
  • “아니. 살아남아야 해.”
  • 진우가 소희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소희는 그 온기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 그날 이후, 소희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 승혁은 그녀를 한국으로 데려왔다. 거대한 저택. 고딕 양식의 성 같은 집. 하지만 그 안은 감옥이었다.
  • 소희는 매일 배웠다. 말투, 걸음걸이, 식사 예절, 표정. 모든 것이 훈련이었다.
  • “똑바로 서. 눈은 감지 말고.”
  • 가사도우미 이 여사는 기계처럼 가르쳤다. 소희는 하루도 빠짐없이 검사를 받았다. 옷을 벗고, 온몸을 살피고, 아무 이상 없는지 확인하는 시간.
  •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 학교도 보내줬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비싼 학교, 로열 제일고등학교.
  • 거기서 소희는 ‘차성그룹의 공주님’이었다. 애들은 부러워했다. 리무진을 타고
  • 니고, 경호원이 따라다니고.
  • 하지만 소희는 알았다. 이 모든 게 새장 속의 화려함일 뿐이라는 걸.
  • 밤이면 혼자 방에 갇혀 창밖을 바라봤다. 자유는 없었다.
  •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 소희는 열여덟 살이 되었다. 얼굴은 더 예뻐졌고, 키도 훌쩍 컸다. 교복을 입으면 어디서 본 화보 같다는 소리를 들었다.
  •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 학교에서 소희는 인기였다. 매주 금요일이면 고백하는 남학생들이 줄을 섰다. 그중에는 이현우라는 애도 있었다. 얼굴도 잘생겼고, 성격도 좋고, 집도 좋은 완벽한 남자애.
  • 소희는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다가가지 못했다. 자신의 정체를 알면 그도 떠날 거라는 생각에.
  • “소희야, 오늘 카페 갈래?” 친구 지연이 물었다.
  • “미안, 오늘은 못 가.”
  • “또 통금이야?”
  • “……응.”
  • 소희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집에 돌아가야 했다.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 교문 앞에 리무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호원이 문을 열어줬다. 소희는 아무 말 없이 올라탔다.
  •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창밖 풍경이 스쳤다. 저 멀리 하늘은 잿빛이었다.
  • 5년. 너무 길었고, 너무 짧았다.
  • 저택에 도착했다.
  • 소희가 현관에 들어서자, 이 여사가 나왔다.
  • “식사 하시겠어요?”
  • “그래.”
  • 긴 식탁. 혼자 앉아서 먹는 밥은 항상 맛이 없었다. 씹고 삼키는 게 기계적이었다.
  • 식사가 끝나자, 이 여사가 말했다. “올라가시죠.”
  • 소희는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익숙하게 옷을 벗기 시작했다.
  • 이 여사가 다가와서 온몸을 살폈다. 5년 동안 매일 하는 일. 손끝 하나, 피부 한 군데 빠짐없이.
  • “끝났어요?”
  • “네.”
  • 소희는 옷을 입었다. 이 여사가 문가에 서서 조용히 말했다.
  • “며칠 안 남았습니다.”
  • “뭘요?”
  • “회장님께서 돌아오십니다. 아가씨 생일에.”
  • 소희의 손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