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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 집에 들어서자마자 강지후가 기다렸다는 듯 달려와 내 몸을 훑었다.
  • “서윤아, 왜 이렇게 늦었어? 혼자 밖에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춥지 않아? 손이 꽁꽁 얼었네. 어서 녹여, 동상 걸리겠다.”
  • 긴박하고 애틋한 목소리. 조금 전 차갑게 독설을 내뱉으며 나를 비웃던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나는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10년을 봐온 얼굴이 처음으로 가죽을 뒤집어쓴 기괴한 괴물처럼 느껴졌다.
  • 나는 아무 말 없이 소파에 앉았다. 그때 테이블 위에 놓인,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컵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내 시선을 느낀 강지후의 몸이 순간 눈에 띄게 굳었다. 그는 서둘러 비굴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 “아, 방금 손님이 좀 왔다가…….” “비서가 그러던데, 너 밖에서 나 찾느라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며.”
  • 내 서늘한 한마디에 지후의 말이 단칼에 베인 듯 뚝 끊겼다. 공기가 얼어붙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 그는 입을 달싹였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색함을 깨려는 듯 그는 죽 한 그릇을 가져와 내 입가에 대주려 했다.
  • “밖에서 떨다 왔으니 춥지? 내가 방금 끓인 죽이야. 한 입 먹어볼래?”
  • 대꾸하지 않고 웃으며 그가 든 그릇을 뺏듯 받아 직접 한 입씩 떠먹었다. 지후의 손이 허공에서 민망하게 멈췄다. 그의 가슴이 미세하게 들썩였다. 불쾌함이 섞인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 “어때, 기운이 좀 나? 널 한참 찾았는데 안 보여서 일단 돌아왔어. 화내지 마, 응?”
  •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 망설임조차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당장 소리를 지르며 서운함을 토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저 차분하게 그릇을 내려놓았다.
  • “다 먹었어. 그릇 치워줘.”
  • 지나치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내 말투에 지후는 멍하니 서 있다가 빈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그가 다가오려던 찰나, 테이블 위에 놓인 차현우와의 **‘결혼 계약서’**를 발견했다.
  • “서윤아, 누가 결혼해?”
  • “친구가 계약서에 문제없는지 좀 봐달라고 부탁해서.”
  • “그래? 남자야, 여자야? 내가 아는 사람인가? 이런 피곤한 일을 왜 나한테 안 맡기고 서윤이한테 부탁했지?”
  • 평소엔 관심도 없던 질문들을 쏟아내는 그를 무시한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반응이 냉담하자 강지후의 얼굴에 서운함이 스쳤다.
  • “서윤아,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오늘 너 좀 이상해.”
  • “정말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피곤해서 쉬고 싶으니까, 신경 꺼.”
  • 강지후는 눈에 띄게 실망한 기색으로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말해달라는 그의 약속은, 그 인간 자체만큼이나 역겨웠다.
  • 그때였다. 강지후의 휴대폰으로 비서의 급박한 전화가 걸려왔다.
  •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한유라 씨 쪽에 문제가 생겼어요. 성진 그룹에서…… 파혼하겠답니다!”
  • 동시에 내 휴대폰에도 짧은 메시지가 도착했다.
  • [이쪽으로 와요. 답을 주지. - 차현우]
  • 강지후는 나를 돌아볼 새도 없이 문을 박차고 나갔다. 다급하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차현우가 움직였다. 나의 복수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 강지후의 뒤를 쫓아 도착한 별장. 차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냉담한 표정으로 서 있는 차현우와, 그 발치에서 눈물 범벅이 된 채 무너져 있는 한유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