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저물 때까지 내가 집에 들어가지 않자, 지후는 기다렸다는 듯 익숙하고 다정한 메시지들을 쏟아냈다.
[서윤아, 어디야? 눈이 이렇게 많이 오는데 위험해. 위치 찍어주면 내가 지금 바로 갈게.] [왜 답이 없어? 아침에 마중 못 나간 것 때문에 아직도 화난 거야?] [화내면 주름 생겨, 우리 공주님. 네가 좋아하는 수플레 사놨으니까 제발 화 풀어, 응?]
애정과 걱정이 듬뿍 담긴 글자들. 예전 같았으면 가슴 설레며 미소 지었을 그 다정함이, 이제는 구역질 나는 오물처럼 느껴졌다. 한유라와 함께 드레스를 고르던 그 손으로 나를 향해 이 가증스러운 문장들을 타이핑했을 그를 생각하니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그의 비서에게서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 화면 속 지후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붉어진 눈시울로 나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우리가 함께했던 추억이 깃든 장소들을 샅샅이 뒤지며 절박한 연기를 펼치는 와중에도, 틈틈이 내게 걱정 어린 메시지를 보내는 치밀함까지 보이며.
영상 뒤에는 비서의 다급한 메시지가 이어졌다.
[서윤 씨, 대표님이 서윤 씨를 못 찾아서 지금 거의 미치기 직전이에요! 제발 빨리 연락 좀 주시고 집으로 돌아가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아주 잠시, 10년의 세월이 만든 미련한 마음 한구석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 찰나의 흔들림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처참히 부서져 내렸다. 현관문을 열기도 전, 도어록 너머로 흘러나오는 한유라의 목소리가 내 발을 묶었다.
“지후야, 오늘 여기서 자고 가게 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서윤이가 우리 연락하는 거 싫어하잖아. 지금 둘이 싸운 것 같은데, 가서 달래줘야 하는 거 아니야?”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내 손이 허공에서 굳어버렸다. 이어지는 지후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서늘했고, 짜증이 가득 섞여 있었다.
“그 나이 처먹고 애도 아니고, 뭘 자꾸 달래줘? 그리고 내가 실수로 그 부모 좀 죽였다고 해서, 평생 그 계집애 비위나 맞추며 살아야 해?” “어차피 대충 찾는 척 연기 좀 해주면 감동받아서 울고불고 매달릴 게 뻔한데. 난 이미 너를 위해서 내 행복까지 포기하고 남은 인생을 그 여자한테 담보 잡혔어. 도대체 뭘 더 바라는 거야?”
더 이상 들어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내 온몸을 난도질했다. 나는 비명을 지르려는 입을 틀어막고, 비틀거리며 그 자리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운명처럼 한유라와 마주쳤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승리감과 비열한 적대감이 가득했다. 한유라는 기다렸다는 듯 내 앞을 가로막아 섰다.
“오랜만이네, 은서윤. 지난 몇 년간 나 피하느라 고생 많았지?”
한유라는 가증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 곧 성진 그룹 차현우 씨랑 결혼해. 이게 다 너희 집안 덕분이야. 아니, 정확히는 ‘서윤이’ 덕분이지. 너희 집 후원이 없었으면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겠어? 안 그래?”
나는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며 낮게 읊조렸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별건 아니고, 내 결혼식에 꼭 초대하고 싶어서. 아, 그리고 이건 몰랐지? 내 결혼 생활이 평탄하도록, 지후가 기꺼이 내 ‘백업’이 되어주기로 했거든. 자기가 내 뒤를 지키는 든든한 뒷배가 되겠다나 뭐라나.”
한유라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내 심장에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네 남자가 나를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데, 기분이 어때?”
그녀의 눈에 스치는 비열한 우월감을 보며 나는 형용할 수 없는 살의를 느꼈다. 하지만 그 비참한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지후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치욕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내 몸의 일부처럼 자리 잡은 본능적인 사랑.
하지만 그 사랑은 이제 부모님을 죽인 원수들이 내뱉는 조롱 앞에서 치명적인 맹독으로 변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구역질을 억누르며 차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갈게. 결혼식, 반드시 가야지.”
그들을 완벽하게 무너뜨리려면, 일단 그들이 세운 그 견고한 계획 속으로 내가 직접 걸어 들어가야 하니까. 그 화려한 예식장을 지옥의 단두대로 만들어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