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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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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5.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
  • 정후가 숙소로 돌아간 이후 남은 잠을 청한 지현은 아침부터 번역 작업으로 정신이 없었다.
  • 프리랜서일수록 시간 관리를 잘 해야 생활이 무너지지 않았다.
  •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생각은 잠시 미뤄두고 작업에 몰입하다 보니
  • 어느새 오후 네시였다.
  • 오래 앉아 있어 뭉친 어깨를 잠시 스트레칭한 뒤 지현은 차를 달여 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 카페인이 안 받는 체질인 덕에 마시게 된 차였는데 머리가 복잡할 때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효과가 있었다.
  • 작업이 끝나니 머릿속에 다시 정후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 '우리 결혼하자.'
  • 자신이 이별을 고한 충격으로 마음이 급해져 홧김에 말한 게 아닐까 생각도 해봤는데
  • 홧김이라기에는 정후가 얘기하는 계획들이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 내내 진지한 정후의 모습에 지현도 자연스레 '결혼'이라는 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하게 됐다.
  • 결혼, 결혼이라. 우리의 결혼.
  • **
  • "엄마 나 혼자 사는데 무슨 반찬을 이렇게 많이 해왔어."
  • "혼자 살수록 냉장고를 꽉꽉 채워놔야 되는 거야."
  • 반찬을 했다며 오랜만에 집에 들른 엄마였다.
  • 손 큰 안여사는 오늘도 양손 가득 반찬을 들고 왔다.
  • 혼자 다 먹지 못한다는데도 매번 양이 더 늘어나는 것 같았다.
  • "어차피 정후도 자주 와서 먹을 거 아니야. 그래서 더 넉넉하게 했어."
  • "엄마 정후 은근 양 적어."
  • "힘쓰는 게 일인 애가 왜 양이 적어."
  • 실제로 정후는 양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물론 자신에 비해 훨씬 많이 먹긴 했지만
  • 평소 너튜브에 나오는 운동선수들이 먹는 양만큼 먹는 건 아니었다.
  • 많이 먹는 운동선수들의 영상을 보면 정후는 항상
  • '소도 저만큼 먹으면 물릴 텐데.' 하며 학을 떼는 반응이었다.
  • "어쨌든 먹다 부족한 것보다는 먹고 남는 게 낫지. 잘 안 상하는 음식들로 챙겨왔으니까 두고 먹어."
  • "알겠어, 고마워요 엄마."
  • 항상 나를 위한 생각들로 가득 찬 엄마의 마음을 알기에 냉장고에 반찬을 정리하는 엄마의 뒤로 가 엄마를 끌어안았다.
  • "얘가 징그럽게 왜 이래."
  • "엄마, 엄마는 결혼할 때 아빠가 먼저 프러포즈했어?"
  • "그건 왜, 정후가 결혼하자고 해?"
  • "아니야, 그냥 물어보는 거예요."
  • 더 묻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엄마는 우리 사이에 결혼 얘기가 나왔음을 눈치채신 것 같았다.
  • 하여튼 눈치 백단이신 안여사.
  • "엄마는 사기결혼이지 뭐."
  • 엄마와 아빠의 연애사를 물으면 항상 나오는 단어였다.
  • 두 분이 지금까지 좋아 죽는 게 보이는데 사기결혼이라니.
  • 간질거리는 말을 못 하는 엄마만의 화법이었다.
  • "아니 그런 거 말고 진지하게- 응?"
  • 평소와 다르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내 모습에 엄마가 콧방귀를 뀌었다.
  • "흥, 금 거북이 들이밀면서 결혼하자길래 그 금 거북이에 넘어간 거지 뭐."
  • "에이 됐어, 안 들을래."
  • 엄마에게 로맨틱한 연애 이야기를 듣는 건 무리였다.
  • 내가 됐다며 식탁에 앉아 사과를 아삭 깨물어 먹고 있을 때 엄마가 다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 "숫기 없는 양반이 금 거북이 들고 손 덜덜 떨면서 결혼해달라고 말하는 걸 차마 거절할 수가 없더라,
  • 이 사람은 나 아니면 못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 엄마에게 처음 듣는 진지한 이야기.
  • 아빠가 그렇게 순수청년이었다니, 놀라운 이야기였다.
  • 감탄하는 내 표정을 보며 엄마는 다시 짓궂게 표정을 바꾸곤 물어왔다.
  • "식은 언제 올리게?"
  • "아, 엄마 아직 그런 거 아니라니까."
  • "왜 보아하니 조만간일 것 같은데, 우리 딸이 운동선수랑 결혼을 할 줄은 또 몰랐네."
  • "아이-"
  • "그런데 엄마는 걱정도 된다. 운동선수 뒷바라지가 어디 보통 일이어야지-"
  • 엄마가 숨겨왔던 걱정을 드러내었다.
  • 운동선수와 결혼한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게 사실이었기에.
  • "너네 둘이 죽고 못 사니까 말은 못 했는데 처음엔 반대였어. 네가 네 일 없는 애도 아니고 일하면서 어떻게 정후 뒷바라지까지 하나 싶어서."
  • 머쓱하게 웃었지만 사실 지현도 내내 해왔던 걱정이었다.
  • 본인 챙길 건 챙기면서 사는 지현이었지만 살림이나 음식에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었다.
  • 며칠 전에는 고작 계란 프라이를 하다가 손을 데었지.
  • 혼자 있을 때는 영양 균형에 맞춰 손질이 필요 없는 생두부, 아몬드, 토마토 같은 것을 간단하게 잘라먹고 마는 지현이었다.
  • 하지만 맨날 경기를 뛰는 정후에게 그런 식으로 똑같이 해줄 수는 없을 터.
  • 지금까지 깊게 생각해오지 않았던 문제에 지현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 "아닌 것 같다 싶으면 언제든지 헤어져도 돼. 요즘 젊은이들 연애 한두 번 하는 게 대수니?"
  • 헤어지라는 말이 아니라 지현이 걱정돼서 나오는 엄마의 마음이었다.
  • 그걸 지현이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 "역시 엄마밖에 없어."
  • "으이그, 이럴 때만?"
  • 작은 집에 웃음소리가 가득 채워졌다.
  • 같이 있는 것만으로 뼛속 깊은 안정감을 주는 가족,
  • 지금 당장은 복잡한 생각들이 가득하지만
  • 분명한 건, 내가 또 다른 가족을 만든다면 그 가족이 너였으면 좋겠다.
  • **
  • "임정후 오늘따라 컨디션 좋아 보인다?"
  • 희성이 데드리프트를 하는 정후의 근처로 와 말을 걸었다.
  • 확실히 오늘 정후는 기분이 좋았다.
  • 지현에게 결혼하자는 얘기를 꺼냈고 지현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기에.
  • "야 무슨 일인데 입꼬리가 귀까지 올라갔냐. 나도 같이 좀 즐겁자."
  • "지현이한테 결혼하자고 했어."
  • 정후의 얘기를 들은 희성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 아니, 지현 씨랑 며칠 전에 헤어졌다고 하지 않았나.
  • 정후가 헤어졌단 소식에 정후를 소개해달란 연락이 피곤할 만큼 계속 왔었다.
  •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그래 사랑은 새로운 사랑으로 잊는 거지 싶어
  • 요새 상태가 준수해 보이는 정후에게 소개 얘기를 꺼내볼 생각이었다.
  • 그런데, 그새 다시 만난다니.
  • 결혼하자고 얘기를 했다니!
  • 정후와 구단에서 제일 친한 사이라 생각했건만 생각지도 못한 배신감이었다.
  • "축하는 하는데 섭섭하다 새끼야.”
  • "네가 왜 섭섭해."
  • 나만 제일 친한 친구라고 생각한 거지.
  •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정후였기에 희성은 그저 고개를 절레 저을 뿐이었다.
  • "됐어, 그건 그렇고 어쩌다 프러포즈까지 한 거야?"
  • 희성이 꺼낸 단어에 정후가 하던 운동을 멈추고 기구에서 다리를 내렸다.
  • 결혼하자고 말을 꺼냈지만, 그게 프러포즈라는 자각은 없었다.
  • "이게 프러포즈인가?"
  • 기구에 걸터앉아 무심하게 얘기하는 정후의 어깨를 희성이 붙잡아 흔들기 시작했다.
  • "그럼 결혼하자고 말하는 게 프러포즈가 아니면 뭐가 프러포즈야! 너 설마 아무 이벤트 없이 대뜸 결혼하자고 한 건 아니지?"
  • "..."
  • "오 주여! 이 단순무식한 새끼를 어찌해야 합니까!"
  • 희성의 반응에 그제서야 정후가 아차-하는 생각을 했다.
  • 그때 아무런 이벤트를 하지 않아서 지현의 마음이 상했을까.
  • 희성의 오버에 운동을 하던 구단 동료들이 몰려들었다.
  • 어느새 그들의 화두는 '프러포즈도 없이 결혼하자 말하는 몰염치한 임정후’였다.
  • 정후는 대뜸 파렴치한이 되어 있었다.
  • 프러포즈 안 한 게 이렇게 비난 받을 일인가.
  •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정후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 얘기만 듣고 있으면 여기 있는 이들이 결혼 20년차는 된 베테랑들이었다.
  • "야 그런데 니들 최근에 여자친구랑 다 헤어졌잖아?"
  • 정곡을 찌르는 정후의 말에 신나게 입을 놀리던 구단 동료들이 바람같이 흩어졌다.
  • 많은 인파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희성 한명이었다.
  • "너도 여자친구랑 매번 100일을 못 넘기고."
  • 열심히 오버를 하던 희성이 그게 뭐가 중요하냐며 하하- 웃으며 정후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 이것들이 진짜.
  • 방구석 전문가가 제일 무섭다더니 그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 그래도 프러포즈를 안 했다는 사실은 정말 마음이 쓰였기에
  • 조만간 진지하게 프러포즈를 해야겠다 계획하는 정후였다.
  • "야 김희성 근데 프러포즈는 어떻게- 아 됐다."
  • 앞에 있는 희성에게 프러포즈는 어떻게 해야 될지 물어보려다 입을 다물었다.
  • 여자친구랑 매번 100일을 못 넘기는 자식에게 물어봐서 뭐 좋은 생각이 나오겠나.
  • 정후의 말에 희성이 열받는다는 듯 항변을 하기 시작했다.
  • "야 왜 말을 하다가 말아 기분 나쁘게! 여친이랑 오래 못 갈 뿐이지 내가 이벤트의 귀재라고!"
  • 그 뒤 시키지 않아도 이벤트 목록을 늘어놓는 희성의 말을 들으며
  • 정후가 휴대폰 투명케이스에 끼워져 있는 지현의 사진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 '기다려, 남부럽지 않게 프러포즈 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