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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나 너 없이 못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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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02. 나 너 없이 못 살아
  • 지현이 없는 첫 주말 정후는 숙소 침대에 누워 하루를 흘려보냈다.
  • 항상 시간이 날 때는 무조건 지현을 만나러 갔던 정후였기에 숙소 동료들은 그와 지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음을 짐작했지만 심각해 보이는 정후의 표정에 지금 그를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걸 알았다.
  • 정후는 지현을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모든 일들이 비현실 같았다.
  •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거라면 누가 날 좀 깨워줬으면 좋겠는데.
  • 잡생각을 하는 걸 제일 싫어하는 정후의 머릿속에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잡생각이 가득했다.
  • 얼굴에 팔을 얹고 미동도 하지 않는 정후를 움직인 건 같은 숙소를 쓰는 명근이었다.
  • “너 지현씨랑 무슨 일 있냐?”
  •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던 정후가 명근의 입에서 나온 지현의 이름에 눈을 돌려 명근을 쳐다보았다.
  • 반나절을 똑같은 자세로 누워있던 정후가 그제서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 정후가 몸을 가볍게 움직일 때마다 몸 마디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 “뭔데 새끼야, 송장처럼 그러고 있지 말고 말을 해봐.”
  • "헤어지재."
  • “뭐? 지현씨가?”
  • 명근의 눈이 커졌고 정후는 무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지현이 그렇게 말했다는 걸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게 아팠다.
  • 아직도 다 믿기지가 않는데 다른 사람한테 얘기하기는 더 힘들었기에.
  • “너네 둘이 깨질 줄은 몰랐는데 역시 세상에 영원한 사랑은 없나 보다.”
  • “닥쳐 아직 안 끝났어.”
  • “지현씨가 헤어지자고 했다며. 그 성격에 그렇게 말하면 끝인 거지.”
  • 명근의 말은 냉정했지만 틀린 말 또한 아니었다.
  • 지현이 어떤 사람인지는 명근보다 정후가 더 잘 알았다.
  • 알고 있지만 우리의 관계를 여기서 끝낼 수는 없었다.
  • 난 이번 생에 네가 다른 남자 만나는 꼴 못 봐.
  • 미친놈이라고 욕해도 좋았다. 제 것이라 못 박은 것에 물러나라고 쉽게 물러나는 정후가 아니었다.
  • 정후는 일어나서 침대 옆 옷걸이에 걸려 있는 모자를 들어 머리에 썼다.
  • 뒤에서 명근이 불렀지만 정후의 귀에는 그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 정후의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생각은 단 하나
  • ‘남지현 난 너랑 못 헤어져.’
  • **
  • 지현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 건물 앞, 오긴 왔지만 지현의 집 문 앞까지는 가지 않았다.
  • 지현이 제일 싫어할 행동이라는 걸 알기에 건물 앞에 서서 지현에게 간절한 메시지만을 보낼 뿐이었다.
  • [나 지금 집 앞이야]
  • [우리 아직 할 얘기 남았잖아.]
  •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
  • 오피스텔 동 앞에 서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후는 지현의 얼굴을 보겠다는 생각 하나로 그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서 있었다.
  • 어디 앉지도 않고 정후는 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내가 할 줄 아는 건 이런 행동들밖에 없어서, 이런 것들이라도 너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닿기를 바라며.
  • 정후의 간절한 바람은 결국 이뤄졌다.
  • 오피스텔 문으로 걸어 나오는 지현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에.
  • 간절했던 연인의 모습에 정후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지현을 끌어안고 싶었다.
  • 나는 이렇게 너를 보기만 해도 애틋함에 어쩔 줄을 모르겠는데 너는 나에 대한 마음 정리가 끝났다니 믿을 수가 없다.
  • “난 더 할 말 없는데.”
  • 미친 듯이 보고 싶었던 사람, 미칠 듯이 듣고 싶었던 목소리.
  • 임정후라는 인간의 삶의 이유인 존재 그 자체.
  • 지현의 얼굴을 보고 지현의 목소리를 듣자 정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 울 생각 전혀 없었는데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 난 네가 없으면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아,
  • 하고 싶은 말들은 물밀 듯이 올라오는데 터져 나오는 눈물 때문에 모든 말들이 목 언저리에서 맴돌았다.
  • “울긴 왜 울어.”
  • 헤어지자고 말했으면서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을 쳐다보는 지현 때문에 서러운 마음이 분수물이 터지듯 터져 흘러나왔다.
  • 정후는 아스팔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지현의 발목 언저리를 손으로 조심스레 감쌌다.
  • 울음으로 뒤섞인 목소리는 지현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뭐 하는 거야 저 바보가 진짜.
  • “농담 아니야, 나 진짜 너 없으면 못 살아.”
  • 지현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정후는 올라오는 비참함을 꿀꺽 삼키며 매달렸다.
  • “힘들었을 거 알아. 너 고생하는 거 알면서도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이렇게 빌 테니까-”
  • “너는 너대로 최선을 다했어. 그냥 우리가 안 맞는 사람들일 뿐이야.”
  • “우리가 왜 안 맞-”
  • “나는 내 남자친구가 내가 필요할 때 옆에 있어주면 좋겠어. 너는 연락할 때마다 훈련, 경기, 훈련, 경기. 분명히 남자친구가 있는데 난 계속 외로워만 지더라.”
  • 지현이 내뱉는 말들이 정후에게 아프게 꽂혔다.
  • 지현이 괜찮다길래 괜찮은 줄만 알았던 지난날들, 무심했던 자신의 모습이 죽일 듯이 후회스러웠다.
  • 제일 아픈 건 이 모든 얘기들을 무표정으로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너.
  • “내가 서운해한다고 바뀔 일도 아니고 항상 그래왔으니까 진짜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난 아직 그 정도 그릇은 못 되나 봐.”
  • 괜찮다고 생각했던 건 착각일 뿐이었다.
  • 사실 부러웠다.
  • 무슨 일이 생기면 남자친구에게 연락하고 남자친구는 곧바로 답장을 하고 바로 달려오는 평범한 연인들의 모습이.
  • 이게 당연한 건데 지현은 무슨 일이 생기면 정후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 자신이 괜히 걱정을 끼쳐 정후의 경기력에 영향을 줄까 봐 무의식적으로 누른 전화 버튼에서 금세 손을 내렸다.
  • 그런 일상들이 하루, 이틀, 사흘 ... 일 년, 셀 수도 없을 만큼 오랜 시간 동안 반복되다 보니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 ‘이렇게 사귀는 게 맞나?’
  • 우리가 왜 이렇게 됐을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정후와 지현이 동시에 한 생각이었다.
  • 내가 조금만 더 널 살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 내가 조금만 더 욕심을 버렸다면 네가 이렇게 힘들어하지 않았을까?
  • 하지만 이미 쏟아진 물은 이런 생각들로 주워 담아지는 게 아니었다.
  • “일어나 정후야.”
  • 지현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정후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을 했다.
  • 정후의 눈물로 얼룩진 눈이 지현의 갈색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 남지현, 너는 아직 날 완전히 아는 건 아닌가 봐.
  • 힘들었다는 네 말을 들으니 너를 놔주는 게 맞지 싶으면서도 이렇게 다정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내게 말을 하면 내가 널 어떻게 놔.
  • “무슨 상관이야, 헤어지자면서.”
  • “운동선수가 무릎 생각 안 할래?”
  • “헤어졌는데 남 무릎이 아스팔트에 갈리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데.”
  • “몰라.”
  • 말도 안 되는 유치한 고집을 부리면서라도 지현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얻고 싶었다.
  • 그래 난 이렇게 유치하고 무식하고 옹졸한 놈이야.
  • 이런 나는 내 사랑을 어떻게 지켜 나가야 하는 건지 아직 잘 모르겠어.
  • 단 하나 확실하게 아는 건 우리 사랑을 여기서 끝낼 수 없다는 거야.
  • “정후야 끝까지 내 마음 불편하게 만들래?”
  • “난 무식한 놈이라 이런 방법 아니면 모르겠어. 네가 헤어지자고 한 뒤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숨이 턱턱 막혀와. 지현아 죽은 사람
  • 살리는 셈 치고 딱 한 번만 더 기회 주면 안 돼?”
  • 무릎을 접고 앉아 정후를 마주 보던 지현의 눈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 정후가 그런 지현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 지현은 여기서 끊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정후의 온기 가득한 손에 긴장이 스르륵 풀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 얼굴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 “너 말고 다른 여자 생각하기도 싫고 생각할 수도 없어.”
  • 정후의 절절한 고백에 지현도 더 이상은 매몰차게 대할 수 없었다.
  • 바보 같은 남자의 무서울 만큼 단순하고 직설적인 고백이 지현이 애써 쌓아두었던 벽을 무너뜨렸다.
  • 정후가 지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고,
  • 눈물로 얼룩진 입맞춤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애타게 서로를 놔주지 못했다.
  • 자기 팔자 자기가 꼰다던 옛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
  • 이별을 마음먹었던 수많은 이유들을 뒤로하고
  • 울며 애원하는 저 남자를 차마 외면할 수가 없으니.